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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유 레디?> 미술감독 이민복
2002-07-18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은 말을 한다

하루 세갑 피운다는 ‘도라지’ 담배 덕분에 그에게선 아련한 향기가 났다. 갈급한 몸짓으로 담배를 피워물고, 음료수를 연신 들이켜는, 조금 소란한 과정이 끝나자 이민복(33)의 길고 긴 얘기가 터져나온다. 어레인지 파일 3권에 빽빽히 들어찬 디자인 페이퍼들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아찔하다. 경탄, 경외 그런 거보단 연민, 동정에 가까운 심정이다(감독님껜 미안하지만). “이걸 혼자 다 하셨어요? 타이 로케는 현지 아트디렉터가 전담한 걸로 들었는데….” 사실이 아닌가보다. 밀림에서의 재난신과 극중 황 노인(안석환)의 월남전 기억신에 등장하는, 타이 상크라부리의 대규모 세트까지가 전부 그의 아이디어였다. “직접 제작까지 참여하진 못했어도, 디자인은 제가 했어요. 타이 현지 스탭은 그냥 제가 준 도면대로 세트만 지었고. 근데 제가 한 부분이 고스란히 빠져서 홍보가 되니 좀 속상하더라구요.” 인터뷰에 동석한 홍보담당자는 그 말 끝에 금세 미안한 눈치다.

영화의 주무대가 되는 ‘아유레디관’의 발원지는 의외다. 먼저 반달 모양을 한 독특한 외양은 9세기 신라시대 왕궁의 지붕재 ‘치미’(기와지붕 양쪽 끝머리의 장식)를 본떤 것이고, 만대루(晩對樓)로 유명한 경북 안동의 병산서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내부를 꾸몄단다. 봉황의 날개깃 모양을 한 치미를 양쪽에 붙여 만든 반달의 형상이나(사진 왼쪽), 서원 앞 누각을 떠받든 8개의 기둥이 만들어내는 자연병풍의 운치가 그대로 스민 관의 내부(사진 오른쪽)는 이야기의 흐름과 적절하게 융화하며, 극의 전개에 가속도를 붙인다.

주인공 강재의 서늘한 성형외과 사무실, 그와 버디를 이루는 동물행동학 연구원 단주희의 아담하지만 외로운 원룸, 이 둘의 어두운 기억이 충돌하는 고스트 맨션은 한 가지 철학 위에 오롯이 몸체를 올리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은 말을 한다.” 보이는 것은 그냥 집, 사무질, 맨션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진짜 자취다. 지난번 <흑수선>에서 이미연이 운영하는 골동품 가게를 디자인했던 그는, 가게에 딸린 음습한 지하창고를 통해 여주인공이 역사 속에 ‘박제된 여인’임을 암시한 바 있다. 이번 영화에서 그는 창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암시하려 했다. 가족을 거부하는 주희는 격자무늬 창에 걸린 그물 같은 그림자로 자신을 결박하고, 일렬로 늘어선 수직창을 통해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는 사무실에서 강재는 내면의 명암에 자주 직면한다.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듯. 그 긴 시간들을 어찌 짧은 몇 마디 말로 대신할 수 있을까.

“일이 끝난 지금은 그저 감사드리는 일만 남은 것 같”다고 긴 한숨을 토하는 그는, 말없이 자신을 따라준 미술팀과 세트 윤기찬 대표, 김윤호 PD에게 공을 돌리며 긴 인터뷰에 맺음말을 단다. 글 심지현 simssisi@dreamx.net·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

프로필

→ 1970년생, 한국종합예술학교 무대미술과 97학번

→ <사랑하고 싶은 여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1990)

→ 오페라 <유관순>(1998), CF ‘모토로라’, ‘야후 코리아’ 및 TV 오락프로그램 등 다수 제작

→ <흑수선>(2001)

→ <아 유 레디?>(2002) 미술감독

→ <보스 상륙작전>(2002) 미술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