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회고전 계기로 본 거장 장 르누아르의 작품 세계(1)
2002-07-19

모두가 모방한 스승,아무도 따라하지 않은 사나이

프랑스의 거장 감독 장 르누아르의 회고전이 부산(7월20일부터 8월4일까지 시네마테크 부산)과 서울(8월9일부터

18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무성영화 시대의 걸작 <나나>(1926)에서부터 <탈주한 하사>(1962)까지 르누아르의 대표작 17편을

만나보자.

편집자

장 르누아르와의 인터뷰를 담은 한 소책자에 서문을 쓴 니콜라스 프랭거키스라는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르누아르를 만나게 되기 전에 어떤 식으로 그의 이름과 마주하게 되었는지를 흥미롭게 들려준다. 풋내기 배우였던 시절 그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미술관의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을 보곤 했는데 그곳 로비에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영화인들의 이름이 적힌 카드들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 카드들 밑에는 해당 인물들이 개인적으로 뽑은 가장 위대한 영화 10편의 제목이 쓰여 있었다. 프랭거키스는 로렌스 올리비에의 카드, 오슨 웰스의 카드, 그리고 엘리아 카잔의 카드 등을 훑어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카드들 아래에는 거의 빠짐없이 장 르누아르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랭거키스는 이것만으로도 그때까지 희미하게 들어본 적만 있었던 르누아르라는 영화감독에 대해 깊은 인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시네필들의 목록 1순위에 오르는 이름

아마도 시네필이라고 자처하는 이라면, 자신의 최고 영화 목록에 르누아르의 영화들 중 적어도 한두편쯤 적어두고 있지 않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듯싶다. 그 르누아르라는 영화감독은 영화역사상 사람들로부터 찬탄의 시선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시네아스트로 첫손에 꼽힐 만한 인물임에 분명하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자신 역시 위대한 영화감독의 반열에 오른 찰리 채플린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이라? 내가 보기에 그는 프랑스인이다. 그는 장 르누아르라 불린다.” 동시대의 다른 영화평론가들보다 먼저 르누아르의 진가를 알아챘던 앙드레 바쟁도 장 르누아르의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자주 (특히 후기로 접어들면서) ‘장 르누아르는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이다’라는 식의 문장으로 시작하곤 했다. 이 밖에도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이란 말은 르누아르에게 달라붙는 가장 간편한(혹은 가장 적절한) 수식어인 것만 같아 보인다. 아무리 영화감독들에게 순위를 매긴다는 식의 사고가 좀 아둔해 보이긴 해도, 르누아르가 보여준 빛나는 영화적 업적과 너른 영향력을 고려해볼 때 르누아르에 대한 그런 식의 정의는 사실 상당히 관성적인 것이면서도 또한 정당성을 상실하지는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장 르누아르는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를 공개하기 바로 전해인 1894년 9월 몽마르트르에서 태어났다. 주지하다시피 저명한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그의 아버지이다. 이미 어려서부터 영화에 흥미를 가졌던 장 르누아르가 영화를 본격적으로 ‘발견’하게 된 것은 군에 있을 무렵 ‘샤를로’(찰리 채플린)가 나오는 영화들을 보고 그의 열광적인 팬이 된 다음부터였다. 이후 그는 메리 픽포드, 릴리언 기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같은 스타들을 동경하게 되었고 미국영화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르누아르가 이때부터 자기 손으로 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가지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도예 일에 착수했다.

아내를 스타로 만들기 위해, 감독이 되다

르누아르의 말에 따르면, 그가 영화 만들기에 투신하게 된 것은 그의 아내 카트린 에슬링(‘아버지’ 르누아르의 모델이기도 했던)을 스타로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두 사람이 나중에 헤어지게 되는 것도 다름 아닌 영화문제 때문이었다. 르누아르의 31년작 <암캐>에 제작자의 요구 때문에 카트린을 주연으로 기용할 수 없게 되자 둘의 관계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1924년 르누아르는 아내가 주인공인 영화 <카트린느 또는 기쁨 없는 삶>의 제작에 참여하면서 앞으로 이어질 긴 영화인생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이 영화의 감독은 알베르 디외도네였으며 여기서 르누아르가 맡은 것은 제작과 시나리오였다. <카트린느…>는 극장 상영의 기회를 갖지 못할 만큼 처참한 실패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르누아르에게 영화를 통한 표현 욕구가 생기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영화다. 같은해에 그는 다시 카트린을 주연으로 기용하고 자신이 직접 연출을 맡아 <물의 처녀>라는 영화를 만들게 된다.

1924년에 시작해서 1962년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을 아우르는 르누아르의 영화인생은, 많은 평자들이 종종 지적하듯이, 용이하게 정리해내기가 매우 어려운 유의 것이다. 흔히 지적되곤 하는, 심도 깊은 공간과 물 흐르듯 유동적인 카메라 움직임과 같은 스타일도, 리얼리즘에의 경도도, 아니면 연극적인 것에의 매혹도, 사실 일관성 있게 르누아르의 전작을 관통하는 요소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리처드 라우드 같은 영화비평가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르누아르를 갖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르누아르가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이라면 그것은 그의 ‘전작’이 너무도 다양하고 풍성하며 또 복합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풍요로운 세계의 개요를 파악하는 가장 정통적인 방법은 그것을 몇개의 구획으로 나눠 들여다보는 것일 수 있겠다.

르누아르의 영화세계는 2차대전이 발발한 1939년을- 이것은 르누아르가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 프랑스에서 <게임의 규칙>을

완성한 해이기도 하다- 전후로 크게 두개의 시기로 나뉜다. 먼저 1939년까지의 전전 시기를 살펴보자면, 이것도 르누아르가 사운드를

받아들였는가의 여부에 따라 또다시 두 시기로 분할이 가능하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무성영화를 만들던 시기의 르누아르가 가장 진력했던

것은, 그 스스로 회고하듯이, 무엇보다도 참신한 비주얼과 창의적인 테크닉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 당시에

그는 폭넓은 스펙트럼에 속하는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면서 빠른 편집, 카메라 움직임, 모형 합성 등의 다양한 테크닉을 마음껏 시도해보았다.

노엘 버치처럼 다분히 형식주의에 경도된 비평가가 이 시기의 르누아르를, 그리고 특히 <나나>(1926)를 매우 중요하게 평가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