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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가상현실 다룬 사이버펑크 시리즈 <하쉬렐름>
2002-07-24

<매트릭스> 뺨치는군

Harsh Realm 무비플러스(재방송 준비중)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등장한 이후, 사이버펑크-SF영화는 좀더 대중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공각기동대>에 이르기까지, 기억과 전자두뇌라는 개념은 ‘마니아’라는 암묵 안에서 유명한 개념이었다. <매트릭스>의 업적은 분명히 여기서 출발한다. 기억과 정체성, 전뇌와 사이버세계- 이것을 시각적이고 구체적으로 형상화해서 대중을 향해 신천지의 문을 열어놓은 것이다. 어려운 개념이 아니라 누구나 대충 감을 잡을 수 있는 개념으로.

의 제작자 크리스 카터의 1013프로덕션이 1999년 야심차게 시작했던 TV시리즈 <하쉬렐름>은 <매트릭스>의 붕어빵이었다. 그리고 가상현실이라는 개념이 대중한테 어필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출발한 드라마였다. 미군이 핵전쟁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어놓은 프로그램 ‘하쉬렐름’이 어딘가 틀어지고, 유능한 군인들은 하나둘씩 이유도 모른 채 가상현실게임 안에 투입된다. 문제는, 하쉬렐름 안의 현재 스코어 1위인 ‘오마르 산티아고’가 하쉬렐름 전체를 장악하게 되면 이 세상과 하쉬렐름은 전도된다는 것이다. 게임 안에 들어간 주인공 토마스 홉스는 자기보다 먼저 들어온 마이크 피노키오와 하쉬렐름 안의 인물 플로렌스와 한팀이 된다. 그리고 홉스는 얼떨결에 하쉬렐름 안에서 산티아고를 이길 수 있는 ‘구원자/그 사람’이 된다.

<매트릭스>가 현실과 매트릭스를 계속 분리하는 반면 <하쉬렐름>은 대부분 하쉬렐름 안에서만 이야기를 전개하고, 한 에피소드를 하나의 레벨 혹은 플레이 그라운드로 설정한다. 홉스는 동료 플레이어(피노키오)와 게임 안에서 얻은 아이템(플로렌스, 강아지 덱스터)을 기반으로 한 에피소드마다 새로운 생존/게임을 벌여나간다. 그리고 <하쉬렐름>은 시리즈인 만큼 승리를 유보- 즉 패배가 주종을 이루기에 훨씬 게임의 느낌이 강해진다. 유사점은 미묘한 차이점이 있을 때 잘 드러나는 법인데, <하쉬렐름>은 미묘한 가상세계의 잔재미를 아기자기하게 잘 구축한다. 잠깐 지나가지만 집(zip)결투, 말 그대로 ‘압축결투’를 벌이는 장면이 그렇고, 프로그램상 오류가 만들어낸 스캐닝/복사판을 통해 원본-복사본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에피소드에 이르면, <하쉬렐름>은 단순한 <매트릭스> 붕어빵이 아니라 유사하기만 할 뿐인 단독적 작품/게임으로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등장인물들의 어디서 본 듯 단순한 성격도 게임의 느낌을 더욱 강화한다. 어디에나 빈대붙는 배짱(X파일의 멀더)과 저돌성(도겟)의 토마스 홉스, 엄마스러운(스컬리) 짠돌이(스타워즈의 한 솔로) 마이크 피노키오, 성실성(레이어스)을 갖춘 천하장사(츄바카) 플로렌스, 유능한 애완동물(R2D2) 덱스터, 모두 게임에서나 볼 듯한 단선적인 캐릭터들이다. 그런데 주인공들에 비해 악역 캐릭터는 복잡미묘하고, 해석 불가능한 매력을 지닌다. 단순무식한 독재자가 아니라 담배 피우는 남자와 제갈공명을 능가하는 천재 오마르 산티아고의 존재는 <하쉬렐름> 자체를 무시할 수 없게 한다. 마리타와 크라이첵이 하나가 된 듯한 잉가 포사는 조커카드 같은 변수로 움직인다. 적군과 아군, 현실과 하쉬렐름 양쪽을 모두 포괄하는 포사의 역할은 깍두기가 아니라 게임을 예측불허로 만드는 최대 공신이다. 주인공만큼이나 악역을 잘 만들어내는 1013 제작진답게, <하쉬렐름>의 매력은 게임이라는 발상만큼 캐릭터 자체가 게임처럼 상호작용을 하는 줄거리 진행에서도 드러난다.

사실 <하쉬렐름>은 보다도 더 설명이 없는 불친절한 시리즈 중 하나다. 왜 단순한 시뮬레이션 게임이 세상을 지배할 정도의 힘을 지니게 되었는가? 왜 산티아고를 이겨야 게임이 끝나는가? 정말로 끝나기는 하는가? 피노키오는 플레이어인가, 아이템인가? 참으로 자잘한 의문이 많은 시리즈인데, 너무 일찍 끝나버리는 바람에 의문만 남기고 저 너머로 사라졌다. 유즈넷에 들어가도 다 질문만 있다. 사실 만들다 중단했기 때문이지만. <하쉬렐름>은 ‘잘 만들기는 했지만 시청률이 낮다’는 이유로 3편까지만 방송하고 중단했다(이런 소리는 우리나라에서만 들을 줄 알았는데). 그동안 제작했던 나머지 6편은 후일 재방송채널 에서 방송되었는데, 우리나라 케이블과 비디오로는 총 9편을 다 만날 수 있다.

고백하자면 중도하차라고 하기에 재미없는 붕어빵이구나, 했던 의심은 첫회를 보고 싹 날아갔다. <하쉬렐름>의 가치와 재미는 시즌7 이후에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쉬렐름>에서 가장 게임 같은 내러티브 재미를 선사한 ‘출구가 없다’의 대본작가 스티브 마에다는 시즌7의 ‘숨쉬는 공포’, 시즌 8의 ‘거꾸로 가는 시간’, 시즌 9의 ‘시간 패러독스’ 같은 걸작들을 양산해냈다. 혹시 저 에피소드들이 재미있었던 분들은, <하쉬렐름>의 재방송을 만나면 꼬옥 확인하세요!남명희/ 자유기고가 zoo@zootv.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