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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내린 <거침없는 사랑>이 남긴 것
2002-07-31

키스 한번 하고 이혼한 바보 같으니라구!

------구둘래 kudle@hihome.com

3년이 지났다. 경주는 달려오느라 부실한 발목을 또다시 접질렸다. 팔 하나만 빌려서 의지해 가려 했으나 정환은 다시 경주를 업는다. 여전히 그들은 가시돋친 말을 하지만 사랑은 여전하여 그 말은 모두 사랑으로 들린다. <거침없는 사랑>은 바보 같은 여자와 후안무치한 남자의, 제목과 달리 ‘머뭇거리는 사랑’을 담았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고도 그들은 결국 키스 한번밖에 하지 않았다. 김치 담가 밥 한번 먹지도 못했다. 그러니 그 속을 헤쳐온 그들의 모습이 계속 머리 속에서 영사된다. 정환이 업고 가니 안심이야 하지만, 미심쩍어 간질거린다. 말하자면 뻔뻔스러운 일이다. 계속 궁금한 것은. <거침없는 사랑>은 이 지면을 한번 방문했다. 하지만 마음이 여의도 포플러 아래 매미소리만큼 시끄럽다. 그래서 7월23일 <거침없는 사랑>이 끝난 다음날 24일, 쫑을 찍고도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해쓱할 작가와 PD를 만나는 일이야말로 매미소리만큼 시끄러워서, 이야기하고 싶어 간질거리는 걸 다독이는 최적의 일이 될 것이다.

노처녀, 사회적 약자

이선희 작가는 92년 단막극 <반지>로 데뷔하여 주간단막극 <박봉숙 변호사>, 미니시리즈 <신비의 거울 속으로>(1995)를 거쳐 <도시남녀> <모델> <로맨스>를 집필했다. 모두 SBS 드라마다. <도시남녀>(<토마토> <명랑소녀 성공기>의 이희명 작가와 공동 집필, 1996)는 왕가위 열풍의 드라마 재현이다. 이 드라마에서 최초로 스타일리스트를 도입했다는 것과 한편당 20곡의 재즈를 편성했다는 역사를 SBS 드라마 홈페이지는 기록하고 있다. 김남주는 이때 머리를 짧게 깎고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리하여 김남주를 대표하는 일하는 당당한 여성 이미지가 확립되었다. 조민기는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로 나온다. 뻔뻔스럽게 김남주의 집을 쳐들어가서 산다. 그외에도 박소현, 김소연, 윤동환, 최진영 등 젊은 스타들이 출연했다. <모델>(1997)은 한재석, 장동건, 염정아, 김남주, 송선미(그리고 장혁) 등이 대거 출연하여 모델과 디자이너의 화려한 세계와 그 이면을 선보였다. <도시남녀>와 <모델>은 트렌디드라마- 가족이 없는 젊은이들의 사랑을 다룬- 지만 여타의 드라마와 달리 불행이 섞여 있다. <도시남녀>에서 김남주와 조민기를 맺어달라고 시청자들이 그렇게 간곡히 부탁했음에도 둘이 머뭇거리며 먼발치에서 서로 쳐다보는 것으로 끝내버렸고, <모델>에서는 한재석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했지만 죽여버렸다(<이브의 모든 것>에서 한재석이 죽는 불행의 그림자는 여기서 드리워졌다). 이를테면 왕가위 영화의 ‘쿨함’의 한국적 소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냉정함은 이후 트렌디드라마의 막가파식 설정에서는 보기 어려워졌다.

주말극으로 편성된 <로맨스>(1998)는 미니시리즈 같은 얼개를 가졌다.이 드라마는 기획 초기 ‘키다리 아저씨’를 표방했다. 노총각 남자는 맞선 본 여자와 결혼하기로 해놓고도 자기가 원조해서 도운 여자를 잊지 못한다. 전체적인 얼개로 따지자면 키다리 아저씨(이경영)가 원조한 여자(황수정)와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이 당연하지만, 남자는 결혼하기로 한 여자(이영애)에게로 간다. 그러니 밑그림을 그린 플롯을 배반하기 위해서 결혼하기로 한 남자와 여자를 세밀하게 포착해내야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해냈다. 이영애는 여기서 처음으로 발랄한 이미지를 보이는데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의 당돌하고 심드렁함을 여기서 훈련했을 법하다. <로맨스>는 제목에서 보이듯 키스하면서 드라마가 끝나는 전형적인 제인 오스틴식 ‘로맨스드라마’다. 남녀가 상대방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해서,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해서 망설이고 돌아서고 엇갈리다가 결국은 키스한다. 로맨스드라마는 무엇보다 키스하는 시점을 향해 돌진한다. 정점을 정한 뒤 앞으로 가면서 계산하는 드라마다. 감정의 파고가 24부 내내 각자 시차 공격으로 파도치다가 결국은 하나로 합쳐져 맥놀이를 이룬다.

<거침없는 사랑>도 셈 밝은 로맨스드라마다. 18부의 거리 키스신, 동그란 레일을 깔아 키스하는 사람만큼 아찔하도록 빙글빙글 돌리는 장면을 위해서 사건은 정점을 향한다. 불륜을 입혀서 뒷부분의 갈등을 고조시키고 처리해야 할 일이 남긴 하지만. 날카로운 첫 키스만 남기고 떠나기 때문에 더욱더 짠하도록.

그리고 로맨스드라마의 단골 주인공은 독신자 여성, 노처녀이다. 겉으로는 심드렁해 보이지만 속은 깜찍하고 겉으로는 차가운 말을 내뱉지만 혼자 있으면 입술을 깨물고 겉으로 넘어지고 실수하고는 속으로는 아파서 잉잉댄다. 이선희 작가의 모든 드라마에는 노처녀가 등장한다. 김남주(<도시남녀> <모델>), 염정아(<윤사월>)를 이어, 이영애(<로맨스>), 그리고 <거침없는 사랑>의 오연수다.

이선희 “노처녀는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드라마는 여자의 장르입니다.”

사족을 달자면 그런 노처녀 박물관의 배후 인물 이선희 작가는 30대의 노처녀일 줄 알았다. 하지만 작가는 45살의 21년차 주부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주부가 지겨워져 10년 전부터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드라마에 약해서 그래요. 닭살 돋는 대사를 못 쓰니까.

커피숍 같은 데서 만나면 될 걸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만나고 공장 가고 수입상 만나죠."

이 선 희 작 가

" 대박상회 찍을 땐데, 100여개 점포가 2∼3시간을 기다려준

거죠. 그 사람들이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인정한 겁니다.”

이 강 현 P D

일하는 30대의 생활속에 뿌리내린 사랑 이야기

과연 <거침없는 사랑>은 여자의 드라마다. 남편을 사이에 두고 갈등하는 그들의 진실함이란! 남자를 빼앗기고 빼앗았지만 솔직한 친구 사이가 된 경주(오연수)와 원희(송선미), 사랑하는 남자의 아내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그려주는 경주, 채옥(유혜정)을 구박하는 남편을 야단치는 시어머니(나문희). 아픈 남편을 버리고 패션쇼 현장을 지킨 여자를 ‘멋있다’고 하는 사람은 ‘같은 여자’ 원희고, 아이를 기르겠다고 방패막이 삼을 남자를 포섭하려는 원희를 무조건 두둔하는 것은 ‘같은 여자’ 난영(박시은)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자 배우들이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면서 이뤄낸 성취다. 오연수는 그전의 반듯한 이미지에서 실수투성이 노처녀로, 송선미는 신세대 발랄한 처녀에서 성공을 바라지만 우울이 드리운 아줌마로, 주로 남편 빼앗기는 나쁜 아내이던 유혜정은 여기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진 미워할 수 없는 여자로 등장한다. 못 보던 얼굴들, 송일국, 공유, 토모의 연기도 자연스럽다. 나문희, 김지영, 김성겸의 연기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듯.

이선희 “캐스팅을 하고 나면 시놉시스를 다시 씁니다. 신인들과 작업을 많이 했는데, 시켜보고 안 되면 다시 쓰는 일, 자주 했거든요. 이번 경우는 원고를 다시 쓰는 경우는 없었지만 그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만을 떼내서 발전시키려고 하죠. 나문희씨 같은 경우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한정환이 어머니 나문희에게 엎드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담아 웁니다. 그럴 때 나문희씨는 울지 않습니다. 걱정과 연민과 남자에 대한 미움이 묻어나는데 입을 꾹 다물고 있죠. 나문희씨의 경우는 워낙 잘하니 맡기는 편이라 지문을 안 쓰죠. 이때도 ‘…’이었죠. 나문희씨한테 정말 좋았다고 말했더니 ‘내가 이 드라마에 누를 끼치지 않게 하나는 한 것 같다’고 말하시더군요.”

이강현 PD “<학교> 2, 3를 하다 보니까 오디션을 많이 보죠. 수십명의 아이들을 두고 스타성, 매력, 서포팅 정도 등의 가능성을 탐색하죠. 이요원, 하지원, 조인성 등이 그렇게 뽑혔습니다. <거침없는 사랑>에 나온 신인들의 경우 비슷한 대안들이 있었지만 인물 자체에 매력이 있는 사람들로 뽑았습니다.”

그리고 조민기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의 인물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인어아가씨> 이전 MBC 일일연속극 <매일 그대와>에서 독일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는데, 알고보니 박사학위는커녕 독일에서 소시지 제법을 공부했던 것이 드러나는 남자로 나온다. 그는 큰아들, 모범생, 우유부단한 이미지의 대표주자다. <피아노>에서 그는 경호와 수아의 죽은 아버지로 나오는데- 사진으로만- 못내 그리운 ‘반듯한’ 아버지 이미지를 적극 활용한 예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게 조민기를 잘못 보고 한 일 같다.

이선희 “어디까지 가나 해보자, 하면서 계속 이상한 짓을 시켰죠. 파스 붙이는 거, 이거 코미디 아닌가 싶어서 많이 망설였지만 한번 시켜봤는데 됐고, 계단에서 구르는 거 이거 될까 했는데, 조민기씨는 그거 진짜 잘할 수 있다고 말하더니 진짜 됐어요. 사람들이 한정환에게 너무 좋은 거만 다 줬다고 그러는데, 사실 그래요, 모든 좋은 거 다 주고 싶었어요. <도시남녀> 할 때는 그렇게 멋있어 보였는데라는 생각에. 장동건도 좋아하지만 성공했고, 한재석도 그렇고, 그런데 조민기는 다르죠. 제 드라마 출연한 사람들 다 잘되었으면 좋겠죠. 쫑파티 때도 신인 애들 붙들고 물어요. 너 역 들어온 거 있냐, 뭐라 그러면, 작가한테 전화하고, 걔들 나오는 드라마 작가한테 전화 걸어서 좋은 대사, 에피소드 주라 그러고. 조민기씨는 이번에 쫑파티 때 보니까 머리를 빡빡 깎았더라고요. 먹고살아야 하니까 드라마 섭외 들어오면 다 해버릴 것 같다면서요.”

무엇보다 <거침없는 사랑>의 미덕은 직업을 가진 이들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묘사한 점이다. 갈등을 고조시키는 장치는 항상 일이다. 지금까지 드라마에서 생소한 직업들, 텍스타일 디자이너, 원단 컨버터와 생소한 용어들이 수시로 등장했다. 꽃을 따주는 것도 도안을 위해서이고, 우연히 만나는 것도 공장에서이며, 한정환의 사랑이 직접적으로 표현된 것도 경주의 도안을 팔러다닌 눈물겨운 행동을 통해서이다.

이선희 “드라마에 약해서 그래요. 닭살 돋는 대사를 못 쓰니까. 커피숍 같은 데서 만나면 될 걸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만나고 공장 가고 수입상 만나죠. 그리고 제가 예전에 옷감 떠 커튼 만들고, 식탁보 만드는 일을 했거든요. 납품해서 팔기도 했어요. 그래서 동대문 그쪽 일은 좀 알죠.”

이강현 “우리나라에서 섬유산업이 사양산업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수영복 원단 등은 우리나라를 여전히 알아주죠. 섬유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래서 그런 게 고마운가 봐요. 대박상회 찍을 땐데, 그 상가는 일찍 열어서 4, 5시가 되면 문을 닫는데 6시, 7시 가서 찍었어요. 100여개 점포가 2∼3시간을 기다려준 거죠. 그 사람들이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인정한 겁니다.”

멜로인지 코미디인지

이강현 PD가 연출팀 MT로 떠나고 난 뒤 이선희 작가와 대방역까지 걸어왔다. 이선희 작가에게 <거침없는 사랑>은 “나도 불륜드라마 한다”라고 해서 쓴 드라마다. 단막극 <윤사월>은 ‘불륜 준비’를 하느라고 썼던 드라마. 하지만 불륜남으로 조민기를 캐스팅해서 기다리게 해놓고도 설정만 갔지 상황은 못 썼다. <거침없는 사랑>은 12부쯤 가서는 너무 많이 울게 되어서 후배집에 가서 글을 써야 했다. 아직도 “경주와 정환이 맺어지게 해주세요” 하는 사람들이 대세인 것에 이해가 안 가고 “어쨌든 이런 나쁜 불륜드라마 같으니라고”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더 공감이 간다. 너무 깊이 들어가기가 주춤거려졌다. 울면서 쓴 신들은 다 지우기도 했다. 그러니 선배 작가들은 이 드라마는 지금까지 드라마 중 드라마 트루기가 제일 엉망이라고 야단을 쳤다고 한다. 경주와 재동이 함께 있는 걸 정환이 발견하고는 재동을 모르는 사람에게서 아이 빼앗듯이 데리고 간 다음날, 경주가 커피를 사들고 온다. 둘은 마주 앉아서는 스트로로 열심히 커피를 빨아 먹는다. 긴장이 가장 고조되어 싸워야 할 시점에 경주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나에게는 사랑하는 말로 들려요”라고 한가롭게 말하고, 경주가 돌아간 뒤 정환은 그녀에게서 받은 선물이 커피가 다였구나 하면서 빈 커피통을 고이 보관한다.

이선희 “긴장감이 고조되면 태만(이영범)이 와서 풀어주고, 코미디인지 멜로인지 헷갈린다고 말해요. 그러면서 그래요. ‘이제 일일극도 쓰겠네, 사건과 관련없는 일로 노닥노닥 잘도 놀더구만.’ 나는 일일극 못 쓴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될 것 같아요.”

어쨌든 하고 싶은 것, 해야 했던 것을 많이 해보기도 했다. 커피숍에 나란히 앉은 처녀 총각들의 유치한 행동들, “나 처녀예요”, “사랑이 밥 먹여주냐” 한번쯤 써보고 싶었는데 어색해서 못 써먹었던 대사들을 얘들(경주, 정환)은 해냈기 때문에 써먹을 수 있었다. 이선희 작가는 드라마를 쓰다보면 관성이 생겨서 안 쓰면 허전해서 단막극을 하나씩 쓴다고 한다. 그리고 3년 쉬면서 기획은 여러 번 엎어졌지만 그때 쓴 시놉과 극본은 장르별로 다양하다. 이제 노닥거리는 사람까지 쓸 수 있을 것 같으니, 이 생산력 왕성한 작가를 다음 어디에서 만날지 아무도 알 수 없으리라. 하지만 그곳엔 시청자들을 가슴 졸이게 하는 로맨스가 담겨 있으리란 것은 확실하다. 매미소리는 아직이지만 대방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