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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터를 켜라>에 나타난 캐릭터의 전형성과 상투성
2002-08-01

전진한 장르,제자리걸음 캐릭터

정말 재미있다. 오랜만에 눈물이 날 만큼 신나게 웃는다. 나뿐만이 아니라 관객 모두가 동시에 자지러진 웃음을 여러 번 나눈다. 물론 그 웃음에 실린 공감의 깊이와 뒷맛은 저마다 다를 법도 하다. 실컷 웃고 나서, 느긋이 되새김질하며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갑자기 난감해진다. 이 재미를 어떻게 글로 옮길 것인가? 재미있게 영화를 보고 나서, 재미없을 것이 뻔한 글을 써야 하는 일이 새삼 막막해진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재미만으로도 충분할 이 영화에는 곰곰이 읽어내야 할 것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10인 10색 폭소 열차

<라이터를 켜라>의 홍보 메인 카피는 ‘본격 트레인 액션’이었다. 언뜻 <언더 씨즈>를 떠올리게 하는- 아닌게아니라 영화 스스로 극중에서 <언더 씨즈>를 자기반영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이 홍보 문구는 분명 과장이고 허위다. 영화 시작 5분이면, 애초에 이 영화가 겨냥하고 있는 것이 달리는 기차의 속도감도 좁은 공간 속에서 긴박하게 전개되는 상황의 스릴도 아님이 분명해진다. 며칠 사이 어느덧 바뀌어진 홍보 문구처럼, 그 기차는 ‘액션 트레인’이 아니라 ‘폭소 열차’이다. 감독에 따르면,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애초에 의도했던 만큼의 속도와 긴박한 액션을 충분히 담아낼 수 없었다 한다. 그런데 그러한 한계가 이 영화에서는 단점이 아니라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영화의 성공은 그동안 한국영화에서 풍부하게 축적되어온 장르적 자원을 동원하여 자신이 잘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소화해냈다는 점에 있다. 그 장르적 자원이란 바로 ‘액션코미디’ 또는 ‘캐릭터코미디’이다. 좁은 공간 안에 우연히 모여들게 된 세 무리의 다양한 인물들. 그 인물들이 때로는 낯익은 편안한 웃음을, 때로는 낯선 새로운 웃음을 선사한다(생각해보면 관객이란 참으로 까다로운 존재이다. 그들은 특정 장르가 약속하는 익숙한 재미를 기대하며 영화관을 찾아오지만 신선하고 짜릿한 배신의 충격을 맛보며 영화관을 나서고 싶어한다. 그런데 <라이터를 켜라>는 이 관객의 이율배반적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캐릭터, 힘차게 대립하고 거세게 충돌하다

이 영화의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은 두쌍의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립과 충돌이다. 백수 허봉구와 ‘깡패 두목’ 양철곤의 라이터를 둘러싼 자존심 대결. ‘양아치’ 양철곤과 국회의원 박용갑의 체불임금(?)을 둘러싼 생존권 싸움. 달리는 열차에 점점 가속을 붙이는 것은 양철곤과 박용갑의 오기 싸움이지만 이야기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최소한의 자존심을 되찾고자 하는 허봉구의 눈물겨운 노력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새로웠던 것은 바로 이 허봉구라는 인물의 영화적 재발견 또는 새로운 전형성의 확립이었다.

라이터 하나에 목숨을 거는 허봉구. 그런데 그의 이러한 무모함이 한순간도 황당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무모함이, 평범한 우리가 한두번씩은 꿈꾸어보았지만 감히 저질러보지는 못했던 그 ‘무엇’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어리버리한 그가 두 깡패(?) 집단 때문에 궁지에 몰린 승객을 구해내는 순간, 그는 평범한 우리 모두의 영웅이 된다. 그런데 그의 영웅 되기가 진정으로 통쾌하고 감동적인 것은 그의 행동이 대단한 의협심에서가 아니라 단지 라이터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당하게 빼앗긴 라이터를 되찾지 못하는 한 영원히 ‘어리버리’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허봉구 자신과 관객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가 라이터를 되찾기 전까지는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고 결심할 때, 관객은 그와 함께 비장해진다. 그가 자신의 숨어 있던 힘(이마)을 발견해낼 때, 관객은 박수로 환호한다. 그가 낙오자라는 정신적 외상을 이겨내고자 낮은 포복으로 돌아설 때, 관객은 터져나오는 웃음과 함께 두 주먹을 불끈 쥔다. 그리고 끝내 그가 되찾은 라이터로 담배를 피워 물며 가슴을 펼 때, 관객은 그와 함께 달디단 그 담배 연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하늘을 바라본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초록 물고기>에서 누아르적으로 형상화되었던 ‘막동이’의 코믹버전이다. 막동이의 비극성이나 허봉구의 희극성은 결국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예비 군복을 입은 남자’로 상징되는 한국인 중 한 집단이 지니고 있는 체험과 정서에 바탕을 두고 형상화된 인물들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순진성, 단순성, 무모성은 말하자면 일종의 ‘사회적 인격’인 것이다. 가진 것, 배운 것이 없고 아무도 불러주거나 찾아주지 않는 그 시기, 그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막막함과 비루함. 그것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게 할 만큼 절박한 것이며 아주 사소한 것에도 분노하게 할 만큼 그렇게 불안정한 잠재 에너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허봉구의 ‘어리버리’함은 그의 타고난 천성이겠지만, 라이터 하나에 목숨을 거는 그의 무모함은 그의 이러한 사회적 인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허봉구라는 캐릭터는 관습화된 상투성을 넘어서서 진정한 전형성을 얻게 된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친구의 장난으로 인해 라이터로 머리를 태워먹은 순간부터, 같은 수법으로 상대를 골탕먹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금도 자신의 어리버리함과 억눌린 듯한 눌변을 벗어던지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의 변함없는 겉모습 속에 화려한 변신의 환희가 있음을 안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어떤 순간’을 환기시키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허봉구라는 인물에 작가와 감독 자신의 체험과 정서가 배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매력적인 캐릭터 없이 진정한 블랙코미디 없다

깡패 두목 양철곤과 국회의원 박용갑. 아쉽게도 이들의 매력은 허봉구에 미치지 못한다. 지나치게 대상화되어 있으며 그만큼 관습적이고 상투적이다. 양철곤과 박용갑의 대립은 애초에 처절한 생존권 싸움이었다. 꼬봉들에게 밥 사먹을 돈도 주지 못할 처지에 놓인 양철곤에게 돈을 받아내는 것은 그야말로 체면(깡패 두목에게 그것은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이 달린 문제이며, 박용갑으로서도 돈을 내준다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치명타가 될 수 있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목숨을 건 싸움이 어느 순간 흐지부지 풀어져버리고 만다. 오로지 조직원들을 위해, ‘피를 나눈 의리’ 하나 믿고 세상을 버텨나가는 듯하던 깡패 양철곤이 갑자기 가족을 떳떳하게 책임지고자 몸부림치는 가장이 되어 울음을 터뜨린다.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위해 고집스럽게 당당함을 잃지 않던 박용갑은 갑자기 우스꽝스럽게 비굴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변신은 그다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사실적 개연성의 문제가 아니라 극적 동기화가 그만큼 부족했다는 뜻이다. 흥분하면 말을 더듬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처지가 라이터 하나에 목숨 거는 허봉구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음을 깨닫지 못하는(분명 느끼고는 있으되) 양철곤의 어리석음은 나름대로의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가 상대하는 박용갑의 모습은 너무나 상투적이었고 그래서인지 너무 쉽게 흔들린다. 그의 이러한 흔들림은 상대인 양철곤의 흔들림을 연쇄적으로 낳는다. 갑자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굴복하는 그에게 계속 오기를 부리려면- 기차를 계속 달리게 하려면- 진정한 가장으로 거듭나고 싶었다는 그다지 설득력 없는 궁색한 명분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배우 박영규는 ‘주유소 사장’에서 국회의원으로 엄청난 신분 상승을 이루었으면서도 그에 걸맞은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다. 모든 기성세대(기득권 세력)는 위선적이고 이중적이라고 하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선언은 <주유소 습격사건>의 그것에서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국회의원 박용갑이 무게있고 진지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이 영화가 주는 웃음에 ‘뼈있는 농담’이 담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중적이고 매력적인 ‘악당’없이 범죄영화의 장르적 진화가 이루어지기 힘들 듯이, 다중적이고 매력적으로 기성세대(기득권 세력)의 모습을 체현하고 있는 인물 없이는 진정으로 뼈있는 ‘블랙코미디’가 나올 수 없다.

그 설정 이상하다, 그 설정 성공했다

돌이켜보면 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참 이상하다. 이야기의 중심 동력인 세 주인공이, 이야기 전개의 필요상 자꾸 자리를 비워야만 하는 것이다. 중반 이후 김승우는 잊을 만하면 나타나서 “그만 내 라이터 돌려주시지!”라는 대사를 반복해야 하고, 차승원과 박영규 역시 “내 놔!-못 줘!” 하는 대사를 반복하는 것 이외에 특별히 할 일이 없다. 어찌보면 이러한 이상한 기본 설정을 끝까지 견지해낸 것이(마지막에 조금 흔들렸지만) 이 영화의 성공 요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성공은 빈자리를 채워준 ‘빛나는 조연’들의 열연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을 만나는 것이 이 영화가 주는 또 다른 기쁨이다. 말수 적은 허봉구의 막강한 우군이자 대변인인 수다맨(강성진)과 침착남(유해진). 그리고 성질 더러운 양철곤의 부하이자 피를 나눈 형제인 찐빠(이문식)와 만수(성지루). 그들의 표정과 몸짓과 ‘깨는’ 대사는 이미 익숙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보면 볼수록 웃기고 새로웠다. 정말 대단한 개인기들이다. 그들 하나하나에게 있어야 할 자리와 상황을 마련하고 배치해주는 감독의 솜씨는 신인답지 않은 숙련도를 보여주고 있다.

단순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움을 더해가는 ‘장르의 진화’를 바라보는 일은 한명의 관객으로서 분명 즐거운 체험이었다. <달마야 놀자> 이후 다시 한번 맛본 신선한 즐거움이었다. 나는 많은 관객과 함께 진심으로 박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 특히 성공적으로 입봉한 감독 장항준과 성공적으로 변신한 배우 김승우에게. 물론,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라는 부담도 함께 말이다.변성찬/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