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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의 감독 대런 애로노프스키
2002-08-01

`포스트 <매트릭스>`를 노린다

아주 가끔씩 별 생각없이 본 영화에서 큰 충격을 받는 경우가 있다. 마지막으로 그런 경험을 한 것은 약 3년 전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친한 미국인 친구로부터 추수감사절 만찬에 초대받은 나는 버지니아주의 샬롯스 빌이라는 도시로 여행을 떠났다. 영화에서나 보던 칠면조 요리를 비롯한 미국의 전통(?) 음식들을 맛있게 먹고 나자, 그 친구는 시내구경도 할 겸 영화나 한편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당시 개봉되고 있었던 <인사이더> 등 몇몇 영화를 보고 싶었던 내 의사와는 달리 그 친구가 고른 영화는 <존 말코비치 되기>. 도무지 어떤 영화인지 전혀 정보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내심 불만족스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근사한 저녁을 대접받은 상황이어서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2시간 뒤, 나는 그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보지 않았다면, <존 말코비치 되기> 같은 좋은 영화를 내가 스스로 찾아볼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레퀴엠>도 그와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대작영화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상황에서 봐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다가, 와이프의 손에 이끌려 억지 비슷하게 <레퀴엠>을 보게 되었던 것. 물론, 극장을 나오면서 와이프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충격의 강도에서 <레퀴엠>은 <존 말코비치 되기>를 훨씬 능가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작은 영화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나 스스로에 대해 반성했을 정도다. 역시 영화란 ‘발견’하는 것이고, 그런 ‘발견’의 즐거움은 대작영화에서는 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던 것. 그와 더불어 <레퀴엠>은 영화도 영화였지만, 대런 애로노프스키라는 만 32살짜리 천부적인 신예감독을 ‘발견’하게 해준 영화이기도 했다.

그렇게 애로노프스키 감독을 발견한 수많은 이들이 그의 신작에 대한 관심으로 쏟아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 벌써부터 엄청난 수로 늘어난 그의 팬들은, 인터넷을 통해 연일 그의 신작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다. 거기에는 <레퀴엠>을 통해 할리우드의 주요 제작사로부터 엄청난 구애를 받은 것이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알려지면서, 그가 자칫 할리우드의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시선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가 비록 할리우드의 제안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그만의 색깔을 유지할 수 있는 작품을 고르고 있는 중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올 10월부터 촬영에 들어갈 것으로 알려진 <The Fountain>.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블란쳇이 주연을 맡아 2003년 개봉예정인 이 작품은, 감독 스스로 ‘Post-<매트릭스>’라고 규정할 정도로 <매트릭스>를 능가하는 충격적인 SF영화다.

그런데 <The Fountain>의 제작이 확정되기까지, 팬들은 혼란 속에서 헤매야 했다. <Unknow SF Project>라고만 언급되었을 뿐, 구체적인 진행상황은 알려지지 않고 갖가지 소문만 무성했기 때문이다. 이라는 가제가 확정되기는 했으나 다시 <The Fountain>으로 바뀌는 과정에서도 몇달이라는 시간이 흐르자, <버라이어티> 등 일부 연예산업 매체마저 이 프로젝트가 ‘넘어졌다’는 성급한 판단을 내렸을 정도였다. 거기에 주연으로 확정된 브래드 피트가 촬영지로 예정되어 있던 호주의 골드 코스트가 아닌 시드니에서의 촬영을 요구하고 나섬에 따라 제작진이 그를 설득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팬들까지 이 영화의 제작에 큰 기대를 걸지 않게 되었을 정도. 하지만 다행히 브래드 피트가 두곳에서 모두 촬영을 하는 절충안에 합의하고, 제작·배급사인 워너브러더스에서도 <The Fountain>의 제작을 서두르면서 정확한 일정이 잡힐 수 있었다.

♣<레퀴엠> 시사회장에서의 대런 애로노프스키와 제니퍼 코넬리.

♣<The Fountain>을 위해 수염을 기르고 있는 브래드 피트.

♣애로노프스키 감독의 차차기작으로 준비중인 <배트맨: Year One>.

그러나 할리우드가 애로노프스키 같은 대어의 차기작에만 관심을 갖고 말지는 않는 법. 애로노프스키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가 <배트맨: Year One>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워너브러더스는, 그에게 차차기작으로 <배트맨: Year One>의 영화화를 제안해 수락을 받아냈던 것이다. <배트맨: Year One>의 작가인 프랭크 밀러의 또 다른 작품 <Ronin>을 <레퀴엠>의 차기작으로 준비하기도 했던 애로노프스키 감독 입장에서도, 새로운 <배트맨> 시리즈의 신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흔쾌히 승낙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부 팬들 사이에서는 아무리 애로노프스키 감독이 만든다고 하더라도 한물간 <배트맨> 시리즈의 속편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크다며, 애로노프스키가 워너브러더스에 의해 농락당한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볼프강 페터슨 감독이 배트맨과 슈퍼맨이 동시에 등장하는 <배트맨/슈퍼맨>이라는 영화를 제작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워너브러더스의 양다리 전략에 속은 것 아니냐는 의견도 표출되고 있다.

여하튼 이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을 둘러싼 갖가지 기대와 우려는, 그만큼 그가 가장 주목받고 있는 신예 감독이라는 사실을 잘 증명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기대와 우려에 대해서는 결국 그가 선보일 작품으로밖에는 해답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년에 개봉될 <The Fountain>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파이>와 <레퀴엠>을 통해 전달해준 그 충격을 SF영화에서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당분간 전세계는 그의 영화세계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너무나 성급히 할리우드의 시스템에 투항해버린 천재의 몰락을 보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레퀴엠> 공식 홈페이지

→ http://www.requiemforadream.com/

<레퀴엠> 한글 공식 홈페이지

→ http://www.requiem.co.kr/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 홈페이지

→ http://aronofksy.tripo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