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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세계 파헤치기 [3]

<싸인> - 전통과 현대의 황금분할

그런 감동과 의미를 끌어내기 위하여, 샤말란은 기발한 장치들을 마련한다. 아니, 사실 그것들은 가장 정통적인 방법이다. 기술만능의 현대영화들이 잊어버리고 있는, 가장 보편적으로 스릴과 서스펜스를 끌어내는 방식. “나는 옛날의 영화제작 스타일에 더 능숙하다.”(샤말란) <싸인>의 제작자 캐슬린 케네디는 “관객의 상상력을 이용하는 연출기법이 구체적인 상황이나 장면을 보여주는 방식보다 관객으로부터 더 많은 긴장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 요즘은 테크놀로지가 모든 것을 다 해내는 영화제작 방식이 범람하는데도 샤말란 감독은 스토리가 최고의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액션을 중심에 두지 않는 그의 영화 스타일에서도 드러난다. 샤말란의 영화는 당연히 액션이 등장해야 할 소재와 내용이다. 그런데도 액션은 거의 최소한이다. <식스 센스>의 유령은 단지 아이의 눈에 보이는 것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언브레이커블>의 액션은 던의 각성을 보이기 위한 장면에서만, 그것도 최소한으로 쓰인다.

<싸인>은 필라델피아 근교의 농장에서 미스터리 서클이 등장하고, 전세계에서 비슷한 현상들이 벌어지면서 생기는 공포를 그리고 있다. 샤말란이 <싸인>을 만들면서 영감을 받은 작품은 <바디 스내쳐> <새>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다. <싸인>에는 이 영화들의 중심적인 주제들이 녹아들어가는 것은 물론, 장면들까지도 유사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연출에서는 히치콕 감독의 스타일이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현대적인 감각도 드러난다”는 캐슬린 케네디의 말처럼, 샤말란의 영화는 전통과 현대가 황금비율로 혼합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싸인>에서도 액션은 최소한으로 구성된다. 심지어 <새>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보다도 적다. 외계의 존재는 최후의 순간까지 쉽사리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보고 들리는 것은 오로지 TV화면 속의 뉴스뿐이다. 샤말란은 액션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스릴과 긴장감을 끌어낸다. 스필버그의 영화를 좋아했던 영화광으로서는 참 의외의 결과다.

샤말란은 이미 있는 것들에서 착안하여, 새로운 것들을 끌어낸다. 만화책을 광적으로 좋아하던 샤말란이 <식스 센스>와 <언브레이커블>의 소재를 얻은 것은 80년대에 보았던 인기만화 <Mage: The Hero Discovered>이다. 이 만화책에서 신비에 싸인 남자를 만난 뒤 자신의 초능력을 깨닫는 이야기와 죽은 사람이 자신이 죽은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야기를 본 샤말란은 십수년이 흐른 뒤 새로운 영화로 탄생시켰다. 그가 빌려온 것은 단순한 착상이다. 샤말란은 그 착상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덧붙이고, 의미심장한 서브텍스트를 깐다. “<스파이더 맨>은 쿨하다. <데어데블>도 멋지고. 하지만 난 차고에 만화책 3천권을 쌓아두고 보는 아이는 아니었다. 영웅, 신화 같은 개념을 좋아한 거다. <언브레이커블>도 현대적인 신화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의 일종이다.” 그런 점에서 M. 나이트 샤말란은 쿠엔틴 타란티노 같은 대중문화의 자식들이다. 자신도 그 사실을 알 뿐 아니라, 자랑스럽게 여긴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다이 하드> <인디아나 존스> <엑소시스트> 세편의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다. 책상 건너편에는 2피트 크기의 슈퍼맨 동상이 서 있다.

메시지 과잉, 더 많은 성찰이 필요하다

출세작 <식스 센스>에 이어 <언브레이커블>과 <싸인>에 이르기까지 M. 나이트 샤말란은 언제나 초자연적인 소재로 관객을 끌어들였다. 이제는 관객도 그의 영화에서 초자연적인 소재 뒤에 가려진 보편적인 메시지의 중요함을 충분히 알고 있다. 테크놀로지와 스피드가 판치는 영화산업에서, 샤말란은 느리고 정적인 영화들로 엄청난 성공을 일궈냈다. 스토리와 캐릭터가 중요하고, 보편적인 감동을 주는 영화는 언제든지 대중의 호응을 받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일깨워준 것이다. 샤말란은 우리가 더 순수하고, 맑아질 것을 요구한다. 그의 영화에서 늘 아이들이 등장하고, 그 아이는 한 어른에게 과거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일깨워주는 상황이 도래한다. “어린아이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어른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순수하고 맑은 동심의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샤말란에게는 그런 믿음이 있다. 황당무계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의 영화가 늘 올곧게 흘러가는 것은 그런 이유다.

M. 나이트 샤말란은 대중적이면서도, 자신의 세계를 차근차근 구축해가는 작가로 인정받을 만하다. 그런데 <싸인>을 보면서 약간 불안해졌다. 샤말란은 “나는 관객을 위해 결정한다. 비평가를 위해 하지 않는다”, “문제는 돈이 아니다. 나에게 돈은 동기를 자극하지 않는다. 최고로 인정받는 것, 그것이 내 목표다”, “상영관의 불이 켜지는 순간 관객이 영화의 내용을 다 잊어버리는 그런 영화는 만들고 싶지 않다. 영화를 본 뒤에도 관객 사이에 오랫동안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오갈 수 있는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자신만만한 감독이다. <식스 센스>과 <언브레이커블>은 그 자신감을 뒷받침해주었다.

<싸인> 역시 뛰어난 작품이지만, 어쩐지 자신의 신념에 도취한 인상을 준다. 절제 대신에 과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액션이나 스타일이 아니라, 샤말란의 메시지 과잉. 마이클 베이는 <나쁜 녀석들>과 <더 록>으로 90년대 액션영화의 스타일을 바꿔놓은 뒤, 3번째 작품인 <아마겟돈>에서 자기 도취의 흔적을 보였다. 그리고 완벽하게 도취한 <진주만>으로 늪에 가라앉았다. <싸인>은 샤말란의 5번째 작품이지만, <식스 센스>로 스타덤에 오른 뒤 세 번째 작품이다. 지나치게 자신만만하다는 것도 M. 나이트 샤말란과 마이클 베이의 공통점이다. 샤말란도 마이클 베이처럼 자아도취의 지옥으로 자진해서 들어갈까?

단지 스타일뿐이던 마이클 베이에 비하여, 샤말란은 그래도 분명한 자기의식과 철학이 있다. <싸인>은 분명 흥미로운 작품이고, 대단히 잘 만들었다. 하지만 샤말란에게는 아직 더 많은 밤이 남아 있다. 천일 동안을 지새우려면, 샤말란에게는 더 많은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성찰이 필요하다.

<싸인>과 미스터리 서클

영국 보리밭에서, 하룻밤 사이에 생긴 일

필라델피아 외곽의 어느 옥수수밭. 불길한 기운에 잠을 깬 농부 그래함(멜 깁슨)은 자신의 밭 한가운데 거대한 기호가 아로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사람보다 키가 큰 옥수수가 같은 방향으로 쓰러져 만들어낸 그 원형의 기호는 그래함의 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 사람들을 들뜬 흥분과 공포로 몰아넣는다. 초자연적 존재의 장난일까, 혹은 외계에서 들려온 어떤 울림일까. <식스 센스> <언브레이커블>의 M. 나이트 샤말란이 <싸인>에서 선택한 이 소재, 영화 속에서는 ‘미스터리 서클’로 불리는 이 신비한 원은 >30년 가까이 목격돼온 ‘크롭 서클’(crop circle)에 기반한 것이다.

서클이 공식적인 매체에 등장한 것은 1980년. 영국 윌트셔의 지방 신문이 처음 서클의 사진을 실었지만 서클을 추적하는 일군의 사람들은 1970년대에 이미 그 시작을 발견했다. 영화와 달리 서클은 주로 영국에 집중돼 있고, 옥수수밭이 아닌 밀밭이나 보리밭에서만 나타난다. 샤말란이 한번도 서클이 나타난 적 없는 옥수수밭을 택한 까닭은 시야가 가려져 있는 상태에서의 공포를 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클은 평온한 일상을 깨는 위협이라기보다 스톤헨지의 거석 유적처럼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매혹적인 흔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서클이 윌트셔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이유도 이곳이 지리적으로 고대 유적과 맥을 대는 장소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을 정도다.

2001년 새롭게 나타난 서클은 인공위성이 수신한 외계의 파장을 디지털 기호화한 뒤 그림으로 재생한 형태라는 난해한 연구까지 나왔다. 서클을 연구한 기상학자 테렌스 메든의 책 <서클 효과와 그 신비>는 이 현상이 강력한 전자파를 동반한 플라즈마 폭풍의 결과물이라는 과학적인 논지를 펼치기도 했지만, 90년대에 좀더 복잡한 형상을 지닌 서클들이 나타나면서 어느 정도 설득력을 잃었다. 사다리와 밧줄을 이용해 밀을 차근차근 밟아 원을 만든 어느 장난꾼들도 단 하루 사이에 이처럼 복잡한 기호를 만들 수는 없었다.

그동안 서클은 UFO나 네스호의 괴물처럼 많은 영화인들의 눈길을 끌어 왔다. 도그마영화 <미후네의 마지막 노래>에 아주 잠깐 서클이 등장하고, <X파일> 일곱 번째 시리즈도 서클을 한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조디 포스터가 <콘택트>를 찍으며 서클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는 것은 확인되지 않은 소문. 미술팀이 모두 달라붙어 수백 피트에 달하는 서클을 만든 <싸인>은 서클을 가장 대규모로 가장 중심에 내세운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영화를 보면 ‘싸인’이라는 제목이 단 한 가지 의미만을 가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샤말란의 영화가 항상 그렇듯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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