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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하다구?그러니까 신나지!<그녀의 기사단,강행돌파>
2002-08-08

컴퓨터 게임

“당신도 알고 있겠죠… 내일… 저 결혼해요.”“…” “그… 그러니까….” “…?” (감고 있던 눈을 뜨면서)“우리 도망가요. 너무 늦기 전에 데리러 와줘요.”

<그녀의 기사단, 강행돌파>는 이렇게 시작된다. 카미암의 공주 레미앙 드 그레이스폰드는 권력 투쟁의 희생물로 원치 않는 정략 결혼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이 게임의 캐릭터와 세계관은 <그녀의 기사단>이란 롤플레잉 게임을 잇고 있다.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레미앙 공주를 지키기 위해 기사단이 결성된다. 첫사랑의 실패 뒤 방탕한 생활에 빠져든 리네르드 넬 아이아스, 100년 동안 한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불로불사의 마법사 레다스 프리스트, 평민 출신의 천재 검사 쥬농 아스페디온, 한때 사신이라 불렸던 전설의 검객이지만 지금은 아내를 찾아 떠돌고 있는 의사 아스가드 시린지 등이 저마다의 사연과 입장을 가지고 기사단에 참여한다. 이제는 해산된 기사단, 하지만 공주의 결혼식장에 단 한 사람의, 한 사람만을 위한 기사단이 난입한다.

이 게임은 횡스크롤 액션게임이다. 정신없이 쏟아져 나오는 적들을 이름 그대로 정해진 시간 내에 전부 해치워야 한다. 다양한 공격과 방어, 거기에 게이머가 만들어낼 수 있는 무한한 연계기까지 숨돌림 틈 없는 액션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난이도가 제법 높아서 무턱대고 뛰어들었다가는 이른바 ‘다구리’에 순식간에 게임 오버다.

<그녀의 기사단> <강행돌파> 모두 일반적인 게임과는 다른 시스템으로 제작되었다. 한국은 물론 외국에도 흔치 않은 크리에이터 위주의 제작시스템이다. 두 게임 모두 ‘별바람 크리쳐스’에 의해 제작되었는데, 놀랍게도 단 두명만의 팀이다. 유통 역시 남다르다. <그녀의 기사단>은 기존 유통망을 통해 판매되었다. 하지만 한국 게임시장의 관행과는 달리 게임 잡지 번들을 내지 않는다는 것을 계약 조건에 포함시켰고, 원래 모습을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제작자의 고집으로 저가 제품인 주얼 출시 역시 무산되었다.

게임 플레이 역시 독특하다. <그녀의 기사단>은 독창적인 전투 시스템, 또 수많은 분기와 엔딩의 줄거리가 묘한 흡입력을 가져 전문가라고 하기엔 부족한 일러스트와 조금은 아쉬운 완성도가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강행돌파> 역시 마니아적 게임이다. 휴대용 게임기용 게임이라는 걸 감안해도 거칠게 느껴지는 그래픽에도 불구하고, 하면 할수록 잡아끄는 힘이 있어서 계속 도전하게 된다.

그런데 조금 황당하지 않나? 단신으로 뛰어들어 수많은 적과 싸우고 또 싸운다. ‘결혼’과 ‘도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완성하기에는 ‘그러니까’라는 말은 너무 빈약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무모한 행동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현 국제정세의 흐름과 카미암의 위치, 그리고 결혼에 있어서의 자유의사가 가지는 철학적 입장을 고려해 볼 때’, 레미앙 공주가 이런 식으로 일장연설을 했다면 목숨을 내걸고 뛰어들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각할 거리와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눈을 감은 채 주저주저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도망가자는 그녀.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개연성 따위는 빛을 잃는다. 결과에 대한 두려움 역시 마찬가지다. 엉성해보이는 오프닝은 게임세계로 뛰어들 인과관계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부터 끌어내고, 게임 플레이는 치밀한 작전도, 믿을 만한 동료도 없는 무모한 단신 강행돌파를 근사하게 구현한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