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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미키오 회고전,8월24일부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려(2)
2002-08-21

미지의 아버지를 영접하라!

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

나루세 미키오의 초창기 걸작 <아내여 장미처럼>(1935)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토키영화로는 뉴욕에서 최초로 상영된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버라이어티>에 실린 이 영화의 리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예술을 애호한다고 떠드는 소수의 사람들에게서나 적당히 인기를 끌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실패할 것이고.” 일본에서는 대단한 인기를 끈 나루세의 영화에 대한 이런 식의 인색한 반응은, 황금기 일본영화의 대표적인 감독들 가운데 하나인 나루세가 이후 오랫동안 국제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게 될 것임에 대한 예견이었던 것일까?

나루세는 <아내여 장미처럼>이 처음 미국 땅을 밟은 지도 거의 반세기가 지난 다음 유럽과 미국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리면서 비로소 국제적인 재평가의 대상이 된 영화감독이다. 죽은 지 15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뒤늦게 그의 영화들을 보고 놀란 서구의 비평가들로부터 ‘일본영화 제4의 거장’이란 호칭을 선사받았다. 그런데 이때부터 나루세에 대한 일종의 상투어구로서 쓰이게 된 이 레이블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흔히 일본영화의 3대 거장이라 불리는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보다 나루세가 시간상으로 나중에 ‘거장’ 대열에 합류했다는 점만을 갖고 보면 그것은 별 문제가 될 것이 없는 무난한 호칭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나루세를 미조구치, 오즈, 구로사와와 동급에 놓기는 어렵다고 하는, 연출력의 ‘서열’에 관한 함축이라면 상당히 불만스러운 것이 된다. 흔히 이야기하듯, 나루세의 영화들은 소시민적 가족의 일상에 균형잡힌 카메라를 가져갔다는 점에서는 오즈의 세계에, 그리고 고난에 처한 여성들을 그렸다는 점에서는 미조구치의 세계에 한발씩을 나눠 디딘 듯하다. 그러나 더 따지고 들어가보면 오즈와도 미조구치와도 다른 독자적이고 매혹적인 영화세계를 훌륭하게 구축한 이가 바로 나루세였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일본의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와 야마네 사다오가 지적하는 것처럼, ‘제4의 거장’이라기보다는 “그저 한 사람의 뛰어난 영화작가”라고 불리는 게 좀더 나을 것 같다.

----힘겨운 15살, 소년에서 어른으로

나루세는 1920년 열다섯살의 어린 나이에 쇼치쿠 가마타 촬영소의 소도구계에 입사하면서 영화계에 발을 내디뎠다. 일찍부터 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이 내향적인 소년이 일찌감치 영화에의 길을 택한 것은 영화에 무슨 대단한 열정을 가져서가 아니라 ‘생활’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 때문이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마저 여의게 되자 곧 ‘어른’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이 어두웠던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나루세는 훗날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나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우리를 배반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나는 여전히 버리지 않고 있다.” 이쯤 되면 나루세의 영화들에서 종종 노출되곤 하는 지독한 염세주의의 기운이 그 자신이 겪은 삶의 쓴 경험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무작정 부인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나루세는 이르면 입사 뒤 1년 만에도 감독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무려 10년 동안의 긴 견습기간을 거친 뒤에야 자신의 영화를 만들 수가 있었다. 1930년에 <참바라 부부>라는 희극영화를 만듦으로써 이후 약 38년에 이르는 긴 세월동안 무려 89편의 영화들을 새겨넣을 두터운 필모그래피의 서두를 장식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힘겹게 펼쳐진 나루세의 필모그래피를, 정말이지 편의를 위해 대략적으로 훑어본다면, 코미디영화에서 멜로드라마로 이월하는 큰 흐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30년대에 나루세는 슬픔의 요소가 스며든 코미디영화들로 두각을 나타냈다가 이후 주로 멜로드라마 혹은 홈드라마로 불릴 만한 영화들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중심 이동을 하면서 나루세의 영화들은 초창기의 자기 과시적인 스타일을 버리고 간소해진 대신 좀더 엄격하고 정제된 스타일을 받아들였다.

이쯤에서 오즈- 어느 정도 유사한 경로를 거쳐온- 를 떠올리는 건 아주 자연스런 반응처럼 보인다. 나루세와 오즈가 유사한 양식의 코미디영화를 만들고 있던 30년대 초반에 기도 시로 가마타 촬영소장이 나루세에게 “나루세, 우린 두명의 오즈를 필요로 하진 않는다네” 하고 말했다는 것은 꽤 유명한 일화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 유사한 이 두 감독의 영화, 예컨대 나루세의 <겁쟁이 힘내라!>(1931)와 오즈의 <태어나기는 했지만>(1932)을 면밀히 비교해보면 나루세의 주인공 가장은 오즈의 그 대응 인물에 비해 좀더 신산한 경험을 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초창기부터 나루세는 오즈보다 삶의 좀더 비관적인 면을 보았던 것인데, 후기에 들어서도 사정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오즈의 후기영화들에서 가정은 기본적으로 서로간의 공경과 예의가 남아 있기에 나지막한 상실감과 비감의 근원이 되는 곳이지만 나루세의 후기영화들에서 그것은 성원들 사이의 불화가 슬픔을 낳는 곳이다. 아주 상징적이게도, 오즈의 영화들에서 아버지를 위한 마음에 결혼을 결심한 하라 세쓰코가 결혼 뒤 나루세의 영화(<산의 소리>(1954))에 등장하면 남편으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하고 버림받는 존재가 되고 만다

F I L M O G R A P H Y

1905년 태어남1920년 쇼치쿠 영화사 입사1933년 <너와 헤어져>(君と別れて) <매일 밤의 꿈>(夜ごとの夢)1935년 <아내여 장미처럼>(妻よの薔薇ように) <세자매>(乙女ごころ三人姉妹)1938년 <쓰루하치 쓰루지로>(鶴八鶴次郞)1951년 <은좌화장>(銀座化粧) <밥>(めし)1952년 <엄마>(おかあさん) <번개>(稻妻)1954년 <만국>(晩菊) <산의 소리>(山の音)1955년 <부운>(浮雲)1956년 <흐르다>(流れる)

1958년 <오늬무늬 구름>(약雲)

1960년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女が階段を上る時)1962년 <외로운 길>(放浪記)1966년 <히트 앤드 런>(Hit and Run)1967년 <흩어진 구름>(亂れ雲)1969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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