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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의 오!컬트 <쉬핑뉴스>
2002-08-22

당신의 태생,인생,그리고 여생

“이제 고생 다 하셨네요.” “말년에 아주 크게 되실 겁니다.”점쟁이를 만날 때마다 한결같이 듣게 되는 말이다. 어릴 때 호기심으로 본 길거리 사주팔자나, 최근에 정말 사는 게 깜깜해서 찾아간 어느 용하다는 점쟁이까지, 20년 시차를 두고서도 한결같이 ‘이제 고생 끝’이고 ‘곧 팔자가 핀다’라고 언제나 똑같이 말해준다. “나중에 잘될 거 지금부터 조금씩 나눠서 잘되면 안 되나”라고 푸념하는 나에게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한평생 속아서 사는 거란다”라고 삶의 비밀 하나를 단순명료하게 폭로하셨다.

어른들은 삶의 한계에 부딪혀서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을 때, “아이고 내 팔자야”라고 신세한탄을 한다. 하는 데까지 했지만, 결국 인간의 한계로 극복할 수 없는 벽. 그것은 팔자. 신세. 그 뿌리는 ‘태생’이다. 믿고 싶지 않지만 인간은 평등하게 탄생하지 않는다. 부잣집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부자일 수밖에 없고 결손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불행의 세례를 받고 태어난다. 공부를 아주 많이 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훨씬 머리가 좋다. 집안에 책도 더 많이 비치되어 있다. 영국의 세계적인 명문대학에는 사투리를 쓰는 학생은 제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입학이 허락되지 않는다. 부유함에 익숙한 사람이 돈을 버는 감각이 더 뛰어나다. 매맞고 자란 아이는 나중에 자기 자식도 때리게 된다. 복권에 당첨된 행운아들 중에서 그 누구도 현명하게 그 기적의 찬스를 발판으로 팔자를 고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패가망신. 무일푼. 복권당첨은 요행으로 팔자를 고쳐보겠다는 지리멸렬한 인생을 완전히 거덜내주는 악마의 장난질에 지나지 않는다.

믿고 싶지 않지만, 태생이란 게 있다.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으면 과거를 돌아보라’라는 말처럼 나의 현재와 미래는 모두 과거의 유구한 역사의 소산이다. 이것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정말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해도 쉽지 않다. 팔자를 고치는 일은 아카시아 나뭇가지가 제 스스로 뿌리와 줄기로부터 절별하고 소나무에게로 접붙이를 시도하는 것만큼이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인간 게놈 유전자를 분석하는 이들은 최근에 자살에 대한 의지조차도 유전자 속에 있음을 발견했다. 게놈 지도 안에서 그 사람의 ‘팔자’를 발견하게 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불행한 유전자. 사업하다가 망할 유전자. 이혼할 유전자. 조실부모할 유전자. 죄인이 될 유전자…. 게놈 지도를 보지 않고서도 이런 걸 알아챘던 것이 사주팔자, 별자리, 인생 십이진법 따위가 아니던가. 태생의 역사는 조상들의 내력을 뛰어넘어 몇겁의 전생에까지 닿아 있을 터이니 그러고보면 착한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하고 선한 사람이 죄없이 악한한테 당하는 현실 속의 불합리한 일들이 영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영화 <쉬핑뉴스>의 주인공 쿼일의 삶이 그러하다. 지은 죄도 없고 악한 인간도 아니지만 억세게 재수없고 더럽고 비참한 삶을 배정받은 인간. 그의 뿌리는 살인과 노략질을 일삼던 조상님들로부터 누이동생을 강간한 아버지와 제 딸을 돈 몇푼에 팔아치우려던 창녀 마누라에 이르기까지 더러운 내력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불행은 자신이 선택한 삶의 결과가 아니다. 단지 그렇게 설정된 삶을 배정받았을 뿐이다. 그는 그렇게 살기로 설정된 인간이다. 불행하게, 억세게 재수없게, 하는 일마다 안 되게, 이유는 단 하나 그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 어느 날 문득, 집안 세간살이를 고스란히 버려두고 이사를 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혹은 어느 날 갑자기 증발하고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낯선 곳에서 은밀한 여생을 즐기는 꿈을 꾸기도 한다. 살다보면 자식이 원수처럼 여겨지고 부모가 물귀신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나의 모든 내력을 삭제하고 걸핏하면 치명적인 오류를 일으키는 삶을 다시 포맷하고 싶다. 과연, 폭풍우에 집이 송두리째 날아가버리고나면 전망은 훨씬 좋아질 것이다.김형태/ 화가·황신혜밴드 http:hshband.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