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오아시스> 4인4색-유운성이 본 <오아시스>
2002-08-23

간절한 침묵의 속삭임

<오아시스>가 우리 영화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으며, ‘이창동 감독은 한국의 에밀 쿠스투리차’라고 주장한 고종석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오아시스>에서 현실과 판타지는 변증법적 통합을 위한 대립물로서 서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조금도 다치게 함이 없이 온전히 자신들의 특성을 유지하며 서로를 강화한다. 영화 속에 마르케스를 불러들이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일 테지만, 빈곤하고 누추한 공간에서 이루어진 빈곤하고 누추한 상상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다. 마르케스의 단편 <사랑 저편의 변함없는 죽음>의 한 부분, “상원의원은 지껄이면서 석판화 캘린더를 한장 비틀어 뜯어서는 나비를 접었다. 슬쩍 선풍기 바람에 태우자 나비는 방 안을 훨훨 날아다니다가 절반쯤 열린 문으로 슬쩍 빠져나갔다.… 석판화의 거대한 나비는 두세번 방 안을 날아다닌 뒤, 벽에 부딪히더니 원래대로 한장의 종이로 돌아가서 그대로 붙어버렸다”. 중증 뇌성마비 환자인 공주가 가지고 놀던 거울에 반사된 빛 속에서, 나는 위와 같은 마르케스적 상상의 완벽한 영화적 실현을 떠올리며 행복에 잠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창동은 공주의 뒤틀린 육체를 갑작스레 보여줌으로써 <오아시스>가 단지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관계에 대한 탐색만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정말이지 이건 장식으로 덧칠된 묘사가 아니며, 우리로 하여금 금세라도 거기서 눈을 돌려버리고 싶게 만드는 불완전한 형상의 폭력적인 현시(顯示)이다. <오아시스>는 이창동이 영화와 대면하여 시네마틱한 것에 대한 탐구로 나아간, 그의 첫 번째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서 그가 비로소 형상에 대한 탐색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우선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종두의 건들거리는 듯한 걸음걸이와 공주의 뒤틀린 몸일 것이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때로 깨진 유리조각이 섞인 풀을 잔뜩 먹인 밧줄로 당신의 심장을 동여매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종두의 그 걸음걸이와,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예기치 않은 사고를 빚어내는 그의 행동으로부터, (좀 이상하지만) 자크 타티의 윌로씨, 특히 <나의 삼촌>의 윌로씨를 떠올렸다. 이 ‘불편한’ 영화에 깃든 유머의 일부는 거기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종두는 한마디로, ‘타티빌’이 없는 현실세계에 내던져져 졸지에 범죄자가 되어버린, 좀더 수다스럽고 모자란 윌로씨다. 그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우리가 끝까지 이 뒤틀린 형상의 세계를 응시하게 만드는 원천이 된다. 둘째, 이창동은 거의 바닥이 드러날 정도의 미장센으로 화면을 채우고(혹은 비우고), 전혀 미학적이지 않게 흔들리는 카메라를 들고 인물들 곁에서 함께 숨쉰다. 이창동은 프레임과 그 속의 형상들을 과격하게 부수는 디지털 시대의 미학적 시도들에 거리를 둔다. 여기에 새로운 미학적 탐구는 없지만, 미학의 유기로부터 길어올린 새로운 형상으로서의 프레임의 창조가 있다. <오아시스>는 스크린의 표면을 몸처럼, 피부처럼 다루면서, 뒤틀린 공주의 몸과 건들거리는 종두의 몸 모두에 호응하는 리듬을 만들어낸다. <오아시스>의 떨림은 형상에 대한 존중이 결국 그것의 포획에의 의지로 향하고 마는 오랜 미학적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암중모색의 결과물이다. 리얼리즘이 결국 ‘지적 엘리트들을 위한 판타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은, 부서지는 형상들을 포착하기 위해 끌어들인 형식이 언제나 또 하나의 미학적 자의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아쉬움은 바로 거기서 연유한 것이었고, 이창동은 <오아시스>에서 그 한계를 가까스로 뛰어넘었다. <오아시스>의 리얼리즘이 진정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여기서의 리얼리즘이란 형식적 선택이 아니라 도덕적 선택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임순례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나 송일곤의 <꽃섬>은 그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망설였다. 마지막으로, <오아시스>는 불완전한 형상, 혹은 거푸집이 우리 자신의 형상을 완전히 깨뜨려버리는 순간을 경험하게 만든다. 우리는 종두도, 공주도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아파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가 끝나고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란, 우리가 종두의 가족, 공주의 가족의 자리에 남을 수밖에 없다는 뼈아픈 인식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우리 자신의 반영을 통해 우리의 성찰을 자극한다면, 이창동은 우리가 간신히 빠져나온 거푸집을 응시하게 만듦으로써 거꾸로 우리의 추악함을 드러낸다. <오아시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버려진 형상이지만, 진정 문제삼는 것은 그것을 통해 만들어진 우리 자신의 형상이다. 요약하자면, <오아시스>는 ‘형상의 발견’을 통해 ‘생활의 발견’에 이르는 영화인 것이다.

물론 <오아시스>가 답변의 나열이 아니라 의문부호로 가득한 영화인 것은 사실이다. 평론은 때로 영화 앞에서 오만을 부리고 싶은 법이지만 이런 영화 앞에선 잠시 겸손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뒤틀린 입에서 간신히 흘러나오는 공주의 말들처럼, <오아시스>는 외침과 침묵 사이에 존재하는 뒤틀린 속삭임이며, 한없이 간절한 속삭임이다.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