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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4인4색-김소희가 본 <오아시스>
2002-08-23

진화하는 작가,진화하는 시대정신

<오아시스> 때문에 불면이다. 졸음이 쏟아져야 마땅한 형편 속에서 시사회에 갔는데 감정을 온통 집중한 나머지 돌아오는 밤길에 무척 힘들었다. 하루를 지내고 난 지금, 또 고스란히 날이 밝았다. 소란스러운 능변 대신 이 영화에 대해서 차근차근 잘 말하고 싶다는 갈망이 무거운 걸음걸이로 덤벼드는 졸음보다 힘이 센 모양이다.

난 <박하사탕>이 싫었다. 내 가슴 한복판을 뜨거운 것이 꿰뚫고 지나가긴 했지만, 유능하게 조합된 관념적인 역사의식의 차가움이 함께 흘렀기 때문이다. 불타올랐지만 얼어붙게 만들었고 유능하고 싶었지만 무능했던 것은 386세대인 내가 80년대에 대해 느끼는 통한이다. 하물며 <초록물고기>는 평범했다.

이제 세편의 영화를 죽 돌이켜보니 이창동이 진화하고 있음을 알겠다. 지금 나는 진화라는 용어를 특별한 마음으로 쓴다. 진화는 전적으로 자신의 현 존재로부터 출발한다. <오아시스>는 이창동이 사회적으로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에 관해 진지한 톤으로 이야기하는 작가라는 자신의 경력과 정체성을 고스란히 껴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무언가 벽에 부딪힐 때마다 외부로 눈을 돌려 신기하고 효율적인 것들을 집어와 탈바꿈하곤 하던 우리의 버릇과 구별된다.

진화는 또한 변화라는 개념을 내포한다. 이창동은 이 사회가 약자를 만들어내고 돌보지 못하는 방식에 대해 새롭고 세밀해진 눈을 가지고 묘사한다. 그 눈이 얼마나 서늘한지, 보는 우리가 힘들고 아프다.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에는 이분법이 있었다. 주인공은 원래 선하다. 그런데 그를 타락으로 내몰거나 억압하는 사회적 역사적 악이 있다. 이같은 이분법은 이를테면 민중과 억압자,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제3세계와 제국주의, 민주와 반민주 등 80년대를 지배하던 이분법적 인식론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다. 두편의 영화를 보는 내 심정은 이창동이 순정하기는 하되 80년대를 진정으로 뒤집어 질문하지는 않는구나였다. 게다가 순수한 유년과 타락의 성년이라는 문학의 오래된 이분법도 답습한다.

이제 이창동은 그것들을 버린 것 같다. <오아시스>는 거창한 도그마에 지배되는 시선 대신 자신의 영혼과 육체의 감수성을 가동시켜서 관찰한 결과물이다. 그의 눈은 인간 하나하나로부터 빛과 어둠을 동시에 본다. 그렇게 모순을 안은 사람들이 어딘가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혹은 무관심한 채로 어둠이라고, 쓰레기라고, 짐이라고 말한다. 이창동은 그곳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그는 그곳에서 가장 밝게 빛나고 있는 영혼의 촛불 두개를 본다. 그들은 정신이 산만한 전과 3범의 남자와 중증 뇌성마비 여자의 육체를 지니고 거기에 떠밀려 박혀 있다. 이창동은 그들에게 홍종두와 한공주라고 이름붙여주었다.

그러고나서 그는 거기 있는 한 무더기의 사람들을 가만가만 조심스럽게 자기가 본 대로 화면 안에 묘사한다. 그는 카메라가 자기 육체의 눈 그대로이기를 바랐다. 그가 카메라로 하여금 삼각대 위에서 내려오기를, 그러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있기를 바랐던 것은 자신이 살살 움직이면서, 그러나 조용히 그들을 관찰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장소는 어둡고 누추하다. 이창동은 그 누추함을 정성스레 묘사한다. 거기에서 잘난 척하고 있는 사람들이래봐야 애처롭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에 배우들로 하여금 자신이 보는 것에 완전히 적중해 들어오도록 ‘조금 더, 조금 더’를 외쳤을 것이다. 그리하여 렘브란트가 검고 어두운 화면 안에서 주인공의 영혼이 발하는 낮고 은은한 빛을 포착했듯이, 이창동 또한 홍종두와 한공주의 영혼이 발하는 진기한 사랑의 향연을 포착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진화다. 한 작가가 진화하고 있고, 그를 통해 시대정신이 진화하고 있다.

<오아시스>는 문학적인 영화다. 영화는 문학을 뛰어넘어야 비로소 독자적인 예술이 되는 것이지만, 한국영화가 문학의 품에서 젖을 떼기는 아직 이른 모양이다. 문인 출신으로서 문학의 힘을 한껏 길어올리고 있는 이창동은 한국 문학의 저력이 한국영화의 소양을 앞서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우리는 시나리오라는 기초를 좀더 배워야 할 것 같다.

나는 이즈음에서 우리의 익숙한 비평 용어들을 교정하자고 제안한다. ‘리얼리즘’, ‘걸작’, ‘별 다섯개’ 이런 것들은 형성된 맥락이 있고 어느 정도 효용성도 있지만, 계속 사용하기에는 무기력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오아시스>에 대해서 이미 리얼리즘과 판타지라는 용어가 동시에 나왔고, 별점을 주자면 아이디어면에서는 세개, 영화적 혁신성면에서는 한개 반, 묘사력에서는 다섯개, 캐스팅과 연기면에서도 다섯개쯤이라고 말하겠다.

이런 판국에 어떤 용어를 써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세계영화사 책이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책을 뒤적이는 데서 더 나아가 여기 이 땅의 작가와 작품을 세밀히 들여다보고, 고통스럽지만 직접 그 이름을 지어 붙이며 분석틀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창동이 그러했듯이.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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