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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 비판
2002-08-28

영화를 소개하는 글이나 리뷰가 아닌 글을 쓰면서 이런저런 영화제목을 직접 들먹이는 글을 쓰고 나면 꼭 뒤탈이 있다. 어떤 영화를 호의적으로 거명하면, 객관적이지 못하다느니 편파적인 홍보라는 둥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고, 반대로 은근히 비판하거나 부정적으로 빗대면서 제목을 썼다가는 파렴치범 취급받기 일쑤다. 후자의 경우 좀 과장하자면 대놓고 ‘씹었다가는’ 밤길을 무서워해야 할 판이다. 특히 상영중인 영화에 대해 뭐라고 비판적인 글을 쓰거나 공공장소에서 촌평을 하는 건 제법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심지어 개봉 전에 열리는 시사회 같은 데서는 너무 재미가 없거나 함량미달이어서 어이없는 영화를 보고도, 소감을 묻는 관계자들에게는 한결같이 ‘그런 대로 재미있다’고 인사를 해야 한다(이럴 때 나는 가급적 그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잽싸게 사라진다).

글을 쓰면서 언급한 영화제목 때문에 험한 소리를 들은 적이 몇번 있다. 요지는, “동업자들끼리 그러면 되느냐”로 시작해서 “이 영화 수입하는 데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아느냐, 남 장사 망치게 할 일 있냐”, “뭐 잘났다고 남들 고생해서 만든 영화를 두고 왈가왈부하느냐”는 데까지 이른다. 이를테면 최근 한국영화에 대한 제작투자 의욕이 크게 위축된 상황을 짚어보는 글에서 ‘제작비는 많이 들였지만 흥행에도 참패할 정도로 어설픈 몇몇 대작 지향 영화가 자초한 면이 있다’는 의견을 내면서, 이에 해당하는 ‘어설픈 몇몇 대작 지향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제목을 썼다가는 구설에 오르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또 ‘뒷북치는 함량미달의 조폭영화도 제작 자본 경색을 초래한 한 요인’이라고 쓰면서 제목을 적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렴풋하게라도 관심을 가진 독자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인데도, 이처럼 직접 제목을 거명하고 말고에 따라 ‘관계자’들의 반응은 하늘과 땅 차이다.

회사나 사람 이야기를 쓸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저러한 감독, 배우, 스탭, 제작자 등과 관련한 비판적인 내용을 쓸 때 대놓고 이름을 쓰거나 회사를 밝혔다가는 상당한 파문을 겪게 된다. 캐스팅, 배급 등 이해관계가 첨예한 문제는 특히 심해서 두루뭉수리하게 얼버무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회피하거나 술자리 안주로 삼고 만다. 문제는 이런 관행이 공익이나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눈감아주기식 공생관계로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상거래 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더라도 너무 쉽게 면피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고보면 말 한마디로 정체성은 물론 사상검증까지 당하는 정치인들에 비하면 이쪽은 비판과 검증의 사각지대라고 할 만하다.

나는 강준만 교수의 실명 비판을 열성적으로 지지한다. 논지의 옳고 그름을 떠나 당당함이 좋아서다. 영화계에서도 작품은 물론 사람이나 회사에 대한 비판이 실명으로 이뤄지면 좋겠다. 물론 칭찬도 마찬가지다. 칭찬은 다양할수록 좋고, 객관적인 성과에 대한 상찬도 있겠지만 부족하더라도 주관적인 근거에 따라 고무하고 격려하는 것도 미덕이다. 반면 비판은 냉철해야 한다. 정확한 사실에 근거해서 논지를 펴고, 당연히 인신공격이나 감정적인 비난은 절대 금물이다. 공개적으로 이뤄지는 이런 칭찬과 비판의 핵심 전제조건은 공신력과 권위다. 나는, 그 기초가 쌍방의 ‘실명’에서 확보된다고 생각한다. 실명 비판이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은 우리 사회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데 너무 인색한 탓이 아닐까. 비판은 욕이 아닌데….조종국/ 조우필름 대표 kookia@jow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