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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적 암울함 그린 컬트 <밀레니엄>
2002-08-28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밀레니엄> 홈CGV월∼목 오후 8시, 토 오전 10시

컬트의 정의를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소수만이 체험하고 같이 공유하는 현상’이라고 정의했을 때, <밀레니엄>은 정말로 컬트이다. <X파일>이 컬트를 걸쳐 주류로 상승한 데 반해, <밀레니엄>은 결국 주류가 아니라는 판정을 받고 시리즈가 종영되었다. 그 점까지도 <밀레니엄>은 철저히 컬트로서 남을 수 있었다.

<X파일>의 제작자 크리스 카터가 야심적으로 만든 시리즈 <밀레니엄>은 말 그대로 세기말적인 암울함을 담고 있는 드라마이다. FBI인 프랭크 블랙은 범죄자의 환상이 머릿속에 보이게 되자 자기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사표를 던져버린다. 그러자 범죄자문위원단인 ‘밀레니엄 그룹’은 프랭크에게 접근해서 이 능력을 범죄심리학에 쓰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밀레니엄 그룹에 가담하게 된 프랭크는 같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점점 밀레니엄 그룹이 세상을 주도하는 비밀결사 엘리트 집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고, 갈등을 일으킨다.

<밀레니엄>은 연쇄살인사건을 기본으로 하지만 그 사건을 둘러싸는 인간의 본성과 선악에 대해 치밀하게 그물을 짜나간다. 영능력이 있는 범죄심리학자를 주인공으로 한다는 점에서 <프로파일러>(The Profiler)와 발상면에서는 똑같다. 하지만 <밀레니엄>은 연쇄살인이나 추리보다도 인간의 선악, 인간의 진리 추구에 대해 질문하며 시청자를 도망칠 수 없게 선과 악의 기로에서 패닉상태로 몰아넣는다.

<밀레니엄>은 시즌에 따라 드라마 성격이 널뛰기를 하는 편이다. 크리스 카터가 주도한 시즌 1은 주로 프랭크 블랙을 중심으로 연쇄살인마 사건과 인간의 사회적 타락과 구원을 다뤘다. 영화 <데스티네이션>으로 이름을 날린 글렌 모간, 제임스 웡 콤비가 지휘를 맡은 시즌 2는 밀레니엄 그룹을 사이비 종교단체로 만들었다는 원성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시즌으로 손꼽힌다. 프랭크처럼 영능력이 있는 라라 민스, 초월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피터 와츠, 현실 안에서 행복과 인간됨을 고민하는 캐서린. 여러 인물들을 다각도에서 부각하며 충돌하게 함으로써 단순히 범인을 통해 인간의 선악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범인을 쫓는 주인공들의 심적 여행을 통해서 인간의 선악, 초월을 다룬다. TV시리즈에서 이런 깊은 주제를 다뤄보았자 얼마나 다루겠는가, 하는 걱정은 오만으로 밝혀진다. 진지한 드라마에서 코미디까지, 장르 불문한 모든 에피소드가 영적 고양현상을 일으킨다. 시즌 3는 시즌 1과 2에서 작가로 활동하던 칩 조한슨이 담당했는데, 객관적으로도 완성도가 떨어졌고, 시즌 2에서 벌려놓은 일을 너무나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중반 이후에 다시 어느 정도의 파워를 회복했는데도 결국 회생불능 판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레이어스와 폴머의 전신으로 보이는, 시즌 3에 등장한 에마 홀리스와 베리 볼드윈도 상당히 좋은 캐릭터였음에도 드라마 초반의 어리버리함이 인물까지 깎아버릴 정도였다.

<밀레니엄>은 연쇄살인의 끔찍함이나 수사과정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가’, ‘이런 상황에도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왜 살인마들은 이런 강박관념에 시달리는가? 강박관념의 이면 뒤에는 정말로 초월적인 선과 악의 투쟁이 있는 것인가? 인간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 그리고 타락의 끝에서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는가. 인간의 존재라는 질문은, 특히나 인간의 가치에 대한 질문은 질문하는 사람 자체를 절망으로 빠뜨리게 마련이다. 절망으로 끝나기 십상인 질문이 공허한 넋두리가 되지 않는 것은 죄의식에 면죄부를 발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 이상, 책임이 뒤따른다. 그 책임을 통감하고 받아들여야만 초월이 뒤따른다.

초월의 존재에 대해 추구하는 인간을 그리면서도 거대한 존재 앞의 먼지가 아니라 끝없는 추진력을 지닌 생명체로 묘사하는 <밀레니엄>의 정서적 충격은 전대미문이다. 은 우리 인간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경계에 서 있다. 그 경계선에서 선을 넘을 것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일반 상식선만 안 넘어가고 자기 혼자 문을 닫아걸면 차라리 다 잊을 수 있다. 그러나 <밀레니엄>은 도피가 불가능하다. 현실이고, 평범함 안에 인간의 악이 도사리고, 바로 내 옆의 사람이 언제든지 악인으로 드러날 수 있다. 외계인은 저 너머에라도 있는데 연쇄살인범은 바로 옆집에 있는 것이다. <밀레니엄>은 단순한 전세계의 멸망만이 아니라 한 개인의 세상도 바로 붕괴할 수 있는 일촉즉발의 가능성을 건드려놓기에 진정한 말세적 세계관을 형성한다.

세기말적 정서를 표현하는, 가슴을 저미는 바이올린 선율과 함께 인간의 존재를 다시금 영적으로 고양시키는 이 시리즈는 현재 시즌 3를 만날 수 있다. 아쉽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영광과 절망과 초월의 시즌 1과 2를 함께 보게 될 날을 기다릴 뿐이다.남명희/ 자유기고가 zoo@zootv.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