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오아시스>의 해피엔딩을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
2002-08-29

내 눈엔 온통 사막만 밟힌다

이 영화는 소외된 비정상인들의 지극히 정상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정상적인 사랑의 과정에 타인들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타인들에 의해 이 사랑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의 과정을 시종 목도한 관객은 그들에게 동화된다. 관객은 2시간 동안의 장애체험을 통해, 살풍경한 현실에 분개하는 한편 “아, 우리가 저렇단 말이지?” 하는 각성으로 가슴에 멍이 든다. 그들에게 영화의 에필로그가 던지는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라는 메시지는 그나마 위로가 된다. 캬! 냉혈한이 아닌 이상 누가 감히 이 도저한 휴머니즘을 거역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뭔가 석연치 않다. 지난달에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보고 난 뒤 느껴지던 전일적 충만감이 없다. 이상하다. 분명 해피엔딩인데, 분명 희망을 이야기한 것 같았는데….

<레미제라블>이 그리는 비참함의 본질은 ‘가난’이다. 가난으로 인해 장발장은 죄수가 되고, 판틴은 환자가 된다. 이 작품이 그리는 ‘비참함’은 모두 경제로 환산 가능하다. 그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모두 강인한 인간들로서 자신들을 외부적으로 억압하는 경제적 불평등과 부당한 국가권력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리얼하게! 싸운다. 그러나 비정상인 종두와 공주의 모순은 정치경제학적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들의 ‘범죄’와 ‘장애’는 빈곤 때문이 아니라, ‘부적응’과 ‘운명’ 때문이다. 결코 외부에 있지 않은 ‘비정상성’이라는 모순은 그들을 ‘소외’시키며, 심지어 ‘변태’라는 새로운 비정상성을 만들어낸다. 그들의 적은 보이지 않으며, 따라서 전선을 만들 수 없다. 그들은 리얼하게! 싸워야 할지, 환상적으로! 꿈꿔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캬. 그림자가 없다.

범죄, 장애, 변태 - 비정상의 요소들

종두와 공주를 ‘비정상’으로 변별하고, ‘소외’로 응징하고 있는 항목은 다음 세 가지이다.

→ 범죄: 국가공권력의 상징인 형사는 자베르와는 달리 선생처럼 타이른다. 그러나 체형(體刑)이 훈육으로, 처벌이 교화로 바뀌었다고 형법체계가 바뀐 것은 아니다. 전과자는 어딜 가나 전과자다. 국가권력은 가족 안에도 있다. 형은 그를 모범시민으로 만들고자 “사람 돼라” 타이르고, 국가권력도 더이상 행사하지 않는 체형을 가한다. 권력은 가족 속으로, 개인 속으로 내면화된다. 내면화시키지 못하는 종두만 외적 권력에 의해 징치(懲治)된다. 주교와는 달리 목사의 공허한 기도는 부적응의 그를 대상화시킨 채 속죄만을 강요하므로 종두를 감화시키지 못한다.

→ 장애: 그녀는 혐오의 대상이거나, 잘해야 동정의 대상이다. 그녀는 신체에 아로새겨진 확실한 ‘비정상’의 징표로 인해 외부세계와 차폐된다. 그녀는 국가에 의해 추방되는 대신 등재되고, 관리된다. 그녀는 집에서 추방되지는 않으나, 결국은 가족과 격리된다. 분업사회에서 사회적 역할이 없는 그녀는 사회적 존재=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주체적 욕망을 지닌 인격적 존재가 아니고, 그녀의 몸은 엄정한 관리를 요하는 물질적 대상일 뿐이다.

→ 변태: 자발적 성욕이 있는 주체와의 성관계만이 강간이 아니다. 또한 같은 종(種)의, 다른 성별의,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대상을 성적 대상으로 삼아야 변태가 아니다. 이런 생산(? 생식!)적인 섹스만이 새끼들을 만들기 때문이다(가로수만 ‘국가재산’이 아니라, 애새끼들이야말로 ‘국가재산’이다.). 주체가 아닌 그녀는 일단 자발적 성욕은 애초에 없는 것으로 간주되므로, 무조건 강간이다. 그런데 그녀를 대상으로 한 성욕이 ‘변태’로 정의되면서 그녀는 주체로서는 물론이고, 감성적 객체로도 사람이 아니게 된다. 그녀에게 복지정책을, 인도주의를 시혜하라는 것과 그녀를 성적 대상으로 향유할 수 있느냐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그녀에게 감각적으로, 육체적으로 이끌리는가? 그녀를 전면적으로, 즉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대뇌에 각인된 미추(美醜)의 관념을 초월할 수 있는가? 인종문제보다 더 어려운 문제이다.

영화는 범죄, 장애, 변태라는 세 항목을 통하여 이토록 어려운 미시적 권력문제를 우리에게 던진다. <레미제라블>에서 그토록 이루고자 하였던 공화정을 이루었건만 자유와 평등은 헌법 속에만 있다. 우리 안에 개인적인 모습으로 도사리고 있는 억압과 차별은 지양되기는커녕 ‘정상/비정상’의 구별을 통해 나날이 심화되고 더욱 정교해졌을 뿐이다. 모더니즘 시대의 총체적인 지배담론이었던 ‘계급모순’은 미시적 권력 앞에서 전일적 힘을 행사하지 못한다.

사랑이 만나는 세 가지 관계

영화는 ‘정상/비정상’을 이루는 탈근대적인 모순들을 제시하면서 그 모순들의 접점으로 사랑을 배치시킨다. 사랑은 이 영화에서 세 가지 지점에서 작동한다.

첫째, 극중인물 사이. 종두가 처음 공주를 보았을 때 그는 단지 본능적으로 그녀를 욕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후 ‘사과’와 ‘대화’와 ‘봉사’라는 인간적 소통 방식을 통해 사회화된다. 그녀는 장난치고, 삐치고, 고백하는 정상인의 사랑행위를 꿈꾸고 흉내낸다. 그들의 사랑은 어쩌면 정상인보다도 더 정상적인 방식을 취한다. 처음 그녀와 맨발을 맞대보고, 후위로, 막무가내로 강간하려던 동물적인 종두가 마침내 눈을 맞대고, 정상위로, 보살펴가며 섹스하는 인간이 된다. 그들의 지극히 정상적인 사랑의 방식은 ‘변태’라는 객관적 규정과 대비를 이루기 위하여 더욱 긴요한 설정이다.

둘째, 극중인물과 관객 사이. 이질적이고 비정상적인 그들의 정상적인 사랑을 지켜보던 관객은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코드로 인해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되고, 마침내 여전히 그들을 비정상적으로 규정하는 타인들로부터는 감정적으로 이화된다. 멜로적 사랑은 극중인물과 관객의 감성을 매개하여 양자간의 이질적 거리를 삽시간에 줄인다.

셋째, 극중인물과 감독 사이. 이 영화는 인물을 바라보는 감독의 자애적인 응시로 가득 차 있다. 종두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그의 어머니가 종두를 바라보는 시선보다 따뜻하다. 흡사 문제아를 바라보는 인자한 선생의 눈이다. 그는 악한이 아니라, 단지 천진할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감독은 영화의 1/3을 할애한다. 그러한 감독의 시선은 급기야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해피엔딩에 대한 암시로 이어진다.

해피엔딩..., 그러나?

영화의 에필로그는 해피엔딩을 암시하지만 리얼리즘이 턱에 걸린다. 지금까지 이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리얼리즘에 기초하여 그 다음을 유추해보자. 종두는 전과 4범으로 가중처벌을 받아 30대 중반에나 빵에서 나올 것이다. 생활능력은 여전히 없고 ‘변태’ 딱지마저 붙고 나니 취직은 더 어렵다. 출감 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라면 형 집에는 발도 못 디밀 것이다. 한편 공주의 오빠는 이 사건으로 장애인을 빈집에 방치한 것이 들통날까봐 그녀를 데려갈 것이다. 그녀는 계속 마루를 청소하며 스스로 용기를 북돋기도 힘들는지 모른다. 범죄로부터의 보호라는 명목하에 골방에 감금된 채, 국밥을 말아서 디미는 밥상이나 받겠지. 종두가 빵에서 나오면 오빠는 강간범 종두를 그녀와 짝지워주려 할까? 종두도 못 미덥지만, 그보다 아파트는 어쩌고? 만만의 콩떡이다. 그러면 그녀는 이번에는 발작을 해서라도 자신의 뜻을 전달할까? 하세월이다. 둘 다 사랑을 알았으니 이제는 인식론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느냐고? 물론이지! 그런데 존재론적으로는, 관계론적으로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악화일로이다. 그러면 이번엔 공주를 보쌈하나? 그러면 납치인데? 또 빵에 가서, 또 편지를 보내나? 악무한이다. 잠시 똥물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이들에게 저승사자 왈 “10분 휴식 끝, 500년 동안 잠수!”

냉랭하고 분절된 현실의 폭압과 차별을 보여주며 가족이고, 교회이고 현실 어디에도 이미 19세기적 휴머니즘은 설자리가 없다고 실컷 확인시켜주고 나서, 생뚱맞게도 “아직 우리에겐 사랑이 남아 있잖아”라고 말하는 감독의 어조는 립서비스이거나 소격효과이다. 이 요령부득의 해피엔딩이야말로 영화적 판타지의 지존(至尊)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충돌, 혹은 불화

영화는 범죄, 장애, 변태의 비정상 코드를 사랑이라는 지극히 보편적인 표면에 미끄러뜨리면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횡단하고자 한다. 사랑은 종두와 공주 사이에서, 그리고 그들과 관객 사이에서 소통과 공감이라는 변화를 이끌어낸다. 한편 영화는 이들 소외된 인물의 주관적 진실을 담아내고자, 판타지를 가미하고 들고찍기를 시도한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문제의식과 형식의 변주는 모두 포스트모던적인 것이다. 그러나 형식의 변주에도 불구하고 미장센은 세련되지 못하며, 정상/비정상 담론의 접점이자,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장치로 상정된 사랑은 감독의 애틋한 시선에 포획되어, 휴머니즘으로 발화하며 급기야 해피엔딩을 암시하기에 이른다. 그 덕에 이 영화는 온갖 포스트모던적 문제의식과 형식상의 시도에 불구하고 휴머니즘에 덜미가 잡힌 채 ‘모더니즘 혹은 그 이전의 낭만주의’로 회귀하고 만다. 너무도 진지한 모더니즘의 사도, 감독에게 불현듯 자신의 문제의식과 취향을 탈근대적인 것으로 바꾸고 싶다는 욕구가 일었던 것일까? 짐작건대 감독은 포스트모던의 정서와 사상을 몸소 체현하지 못했으면서 영화 속에는 너무도 ‘최신의 진실’을 담아내고자 고군분투하였으며, 그 벌어진 간극은 고스란히 연기자의 몫으로 남은 듯하다. 그들의 연기는 정말이지 눈물겹다. 온몸으로 둑을 막는 네덜란드 소년처럼! 그들에 의해 가까스로 그 간극은 봉합되고, 봉인된다.

이 영화가 리얼하게 보여준 ‘진실’에 의하면, 영화의 말미에 감독이 암시적으로 건네고 있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오아시스를 숨기고 있기 때문” 이라는 말은 틀렸다. 오히려 “오아시스가 오아시스인 것은 사방이 사막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은 틀렸다. 우리가 희박한 희망을 특별하게 ‘발견’해내는 것은 주위 사방이 모조리 절망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아시스>를 보고 나도, 내 눈엔 온통 사막만 밟힌다. 사막의 한복판에서 날지도 못하는 남루한 카펫 같은 휴머니즘을 지분거리다 그만 탈진할 지경이다.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chingmee@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