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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희가 옮긴 <시간박물관>(움베르토 에코 외 지음)
2002-08-29

그 남자,베스트 겸 스테디

김석희는 번역계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다. 독자가 가장 많다는 소설판에서도 ‘베스트’와 ‘스테디’를 겸하기는 힘들고, 드물게 그런 사례가 있다 하더라도 3년 이상의 간격을 두고 작품을 발표해야 ‘약발’이 먹혀드는데, 김석희의 번역 작업은 자그마치 10년치가 밀려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는 대학 시절 시-소설 부문 무차별로 문학상을 휩쓴 천재문청이었고(아마 시인 이성복-황지우가 조금 밀렸을 게다), 운에 크게 좌우되는 신춘문예 열병을 심하게 앓으며 ‘잡지파’들보다 데뷔가 썩 늦었으나 과연 첨단적인 소설미학의 소유자라는 평을 들었다.

번역은 일찌감치 생계수단으로 시작되었을 텐데, 이제는 주업에다, 최소한 10년 동안의 운명으로 되었다. 사람들은 ‘힘들고 돈 안 되는 소설 창작’보다 ‘안전하고 돈 되는’(그는 물론 최고급 대우를 받는다) 번역을 택한 것, 아니 택하게 된 것 아니겠느냐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돈보다는 ‘보람’을 택했다. ‘돈’ 때문이라면 대중소설을 쓰면 되니까(그는 ‘대중적’ 능력도 비범하다).

사실 작금의 한국 문화 수준을 보자면 끙끙 앓으며 ‘온몸으로’ 혁신적인 걸작을 쓰는 것보다는 외국의 명저들을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문화운동적이다. 왜냐, 걸작을 알아볼 눈이 미비하고, 그것을 대중과 접속시킬 중간매개가 온통 왜곡되어 있다. 그러므로, ‘니것 내것’ 가리지 않는 게 운동이라면, (외국의) 걸작을 (창작이 아니라) 번역하는 길이 거꾸로 왜곡된 중간매개를 바로잡고 미비한 눈은 보강시키는 첩경인 것이다. 언론과 학자, 그리고 평론가들 대부분이 ‘외국 걸작’이라면 일단 봉대하는 풍토를 감안하면 번역은 ‘전술적’이기까지 하다.

‘번역한 책은 사서 봐야 한다’는 원칙을 꽤나 엄하게 준수하는 그가 내게 준 ‘번역책’은 <몽테뉴 수상록>과 <시간박물관> 두‘건’이었다. <몽테뉴 수상록>은 몽테뉴 산문의 고전적인 ‘청빈단아’를 그대로 한국화한 번역문학의 걸작이라 할 만하다. <시간박물관> 또한 그렇다. 세계 유명 ‘교수’들의 신화역시적인 박학과 시간에 대한 창조적 사유를 결합한 이 ‘외국책’은 귀족적인 품격의 장정-디자인과 함께, 김석희의 소설 문체를 입었다. 장정이야 외국이 앞서겠지만, 소설 문체는 정말 대단한 은총이다. 왜냐. 학자들의 학식과 상상력이 아무리 대단하단들, 소설은 시간에 대한 예술적 사유 그 자체고, 문체는 시간의 응축 아니겠는가. 이 책을 번역한 어느 나라도 이만한 은총을 베풀지 못했을 것이다.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u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