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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도시, 은막의 마법 제59회 베니스영화제
2002-09-02

베니스로 가는 길은 영원처럼 느껴졌다. 비행과 기다림을 합친 스무 시간 끝에 마르코 폴로 공항을 나서 빗물 섞인 어둠으로 어깨를 적시고 있자니 텅 빈 버스가 눈앞에 문을 열었고 버스는 50분의 뱃길로, 뱃길은 차라리 낭하라고 부르고 싶은 좁은 골목길의 그물로 다시 이어졌다. 궁전이니, 카지노니 하는 이름의 영화제 행사장들이 자리잡은 리도섬에 닿으려면 해가 뜬 이후 다시 배와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도착했으나 도착하지 않은 셈이다.” 베니스에 와서 숨을 거두었다는 어느 늙은 소설가의 알 듯 말 듯했던 문장이 곤한 머릿속에 선연하게 떠올랐다. 땅의 안팎이 물로 휘감긴 도시 베니스는 짐작과 달리 이방인을 반기지도 내치지도 않았다. 베니스는 그저 자기의 물 그림자에 도취돼 있다. 물에 비친 제 모습에 홀려 먹지도 자지도 않고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었다는 신화 속의 미소년 나르시스처럼. 그리고 제59회 베니스영화제는, 누구보다 자화상에 강렬하게 사로잡혔던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의 생애를 그린 <프리다>로 11일간 계속될 영화 항해의 돛을 폈다.황금사자의 가치를 회복한다

<프리다>는 개막 전야에 시사를 가진 북구의 경쟁작 <릴리아 포에버>와 나란히 고통과 동거하는 방법을 깨우쳐가는 여성의 스토리로 영화제 첫장을 열었지만, 황량한 <릴리아 포에버>와 대조적인 기름진 스타일을 전시하며, 개막 이틀 전부터 쏟아진 비로 말미암아 압도적으로 색채가 부족했던 영화제에 원색 물감을 들이부었다. 몸과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말하되, 카니발의 흥겨움과 관능미를 유지함으로써 관객의 흥미도 놓지 않으려 하는 <프리다>의 스타일에 도사린 긴장은 올해 베니스영화제의 긴장이기도 하다. “황금종려, 황금곰에 비해 값이 떨어진 황금사자의 가치를 회복한다.” 지난 3월 말 베니스 비엔날레를 둘러싼 정치적인 알력의 여파로 연임하지 않고 자리를 떠난 알베르토 바르베라 집행위원장을 갑작스럽게 대체한 모리츠 데 하델른 신임 집행위원장의 첫 번째 원칙은 실용적이고 명료하다. 그가 꼽는 베니스의 주가 하락 요인은 영화산업에 입김을 끼치기 힘든 수상작 선정과 조직력 결여. 최근 몇년간 베니스는 이국적이고 비의적인 영화들을 선호해 영화제를 프로모션의 스프링보드로 여기는 영화산업 내에서 입지가 좁아진 것이 사실이다.베니스 지역신문 <누오바>와의 인터뷰에서 데 하델른은 “황금사자상은 영화진흥에도 목적을 둬야 한다. 단지 훌륭한 감독이나 작품뿐 아니라 박스오피스 효과도 감안해야 하며 이는 베를린영화제에서도 성과를 본 방침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와 관련해 데 하델른은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풀 프론탈>처럼 영화제가 선호하는 ‘스타’ 감독들의 신작을 메인 경쟁부문이 아닌 섹션에 초청할 수 있는 자신의 섭외력에 긍지를 표명하고 있다.페스티벌을 총괄하는 ‘프로듀서’로서 모리츠 데 하델른이 감당해야 할 또 다른 숙제는 알베르토 바르베라를 추종하는 스탭들과의 호흡 조율. 특히 영화제 메인 상영관 살라 그란데가 있는 팔라초 델 치네마 앞에 떡 하니 솟은 눈치없이 덩치 큰 단상은 이탈리아 스탭과 데 하델른 집행위원장의 커뮤니케이션 실수를 엿보게 하는 ‘스펙터클’로 가벼운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엑첼시오르 호텔에서 팔라초 델 치네마로 이어지던 스타들의 카펫 행진을 없애고 정문에서 사진 포즈를 취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집행위원장이 “뒷줄 사진기자가 기댈 철봉이나 달아달라”고 요청했으나 스탭들이 지은 단상은 영화제 광장의 한쪽 전망을 막아버린 것. 실망한 데 하델른의 촌평에 의해 이 단의 별명은 ‘베를린 장벽’으로 정해졌다.

는 <일 가제티노>의 영화제 전망 기사에서 아일랜드 수녀원의 어둠을 파고든 피터 멀랜의 <막달렌 시스터즈>, 가학-피학적 관계를 그린 아르투로 립스테인의 <열정의 처녀>와 함께 미묘한 논란을 빚을 영화로 관측되기도 했다.소피아 로렌, 샐마 헤이엑… 스타들의 첫 인사네댓편의 영화가 은막에 오르고 영화장터의 천막이 서고 매표소 앞의 스케줄 궁리가 시작된 지 48시간쯤 지나서야 열리게 마련인 영화제 개막식은 언제나 한 박자 늦은 팡파르다. 8월29일 저녁 7시30분 시민들로 에워싸인 팔라초 델 치네마 정문에는 아들 에두아르도 폰티 감독을 동반한 소피아 로렌이 공작새처럼 우아하게 구경꾼의 큰 박수에 화답했고 이탈리아 배우 프란체스카 네리, 심사위원장 공리와 개막의 프리마 돈나 샐마 헤이엑, 기네스 팰트로, 디자이너 조지오 아르마니와 발렌티노 등이 이탈리아 문화부 차관을 위시한 정계, 영화계 인사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예년보다 길이가 짧아진 붉은 카펫을 밟았다. 이어진 개막식에서 프랑코 베르나베 베니스비엔날레 위원장은 “70년을 맞는 베니스영화제는 대리석이 아닌 인간으로 만들어진 이탈리아의 기념비”라고 강조하면서 정부 지원이 삭감되는 상황에서 소중한 기념비를 보존하려면 민간의 재정 참여가 시급하다고 주의를 환기했다.영화제 개막을 즈음해 바다를 옆에 낀 광장으로 변한 팔라초 델 치네마 인근 거리는 성량 좋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이탈리아 관객과 그들에 지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높이는 외국인들의 대화로 쉴새없이 웅성인다. 독일에서 트레일러를 몰고 온 한 중년의 영화팬은 베니스에는 칸이나 베를린과 바꿀 수 없는 여유로운 공기와 뜻밖의 영화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고 보증했지만 프랑스에서 온 청년은 로카르노에 비해 너무 크고 번잡하다며 머리를 헝클었다. “내년의 연임을 말하기 전에 먼저 비엔날레가 무엇을 혁신하고 싶은지 묻고 싶다. 단지 영화제를 연명시키는 일이라면 아무나 해도 된다”고 ‘용병’처럼 쌀쌀맞게 말하는 집행위원장부터 베니스영화제 최초의 관객상을 만들겠다며 플라스틱 라이온상을 내걸고 흥겨워하는 유쾌한 젊은이들에 이르기까지, 59회 베니스영화제 회전문은 막 어지럽게 돌기 시작했다. 영화로 사방이 둘러싸인 섬에서 오도가도 못할 때면 그 회전문에서 하염없이 길을 잃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베니스=김혜리 vermeer@hani.co.kr취재협조 윤성봉·디자인 한정연 han7329@hani.co.kr▶ 제59회 베니스영화제 개막작 <프리다> 제작팀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