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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영화제에서 날아온 일주일 간의 영화일기 [1]
2002-09-09

이 글을 쓰는 지금, 지난 8월29일 개막한 제59회 베니스국제영화제는 종반으로 기울고 있다. 이 글이 읽힐 즈음이면 영화제는 이미 주단을 걷고 커튼을 내렸을 것이다. 며칠 새 베니스 골목골목에 흩뿌려진 명품 옷가게의 마네킹은 탱크톱을 벗고 스웨터로 갈아입었다. 베니스에서 리도 섬을 오가는 배가 한없이 느리고 답답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아침저녁으로 수면의 일렁임을 멍하니 응시하는 동안 영화제는 반을 접고 다시 그 반을 접고 말았다. 덧없어라. 평소에 듣던 ‘기자’ 대신 ‘저널리스트’라는 좀 어색한 이름으로 불리며 영화제의 섬을 맴돌던 먼 나라의 관객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정말 ‘저널’을 써볼까? 8월29일 목요일

영화제에는 있지만 일반 극장에는 없는 것이 있다. 동시통역기, 그리고 무전기 차고 입장객을 통제하는 검은 정장의 장정들. 반대로 극장에는 있는데 영화제에는 없는 것도 있다. 팝콘, 그리고 다른 영화의 예고편. 하지만 역시 인생은 배반의 연속이다. 스티븐 소더버그가 베니스에 내놓은 디지털 신작 <풀 프론탈>(Full Frontal | 부문 업스트림 |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 | 출연 줄리아 로버츠, 캐서린 키너)*을 보기 위해 팔라 갈릴레오 극장에 모인 기자와 영화인들은 미라맥스 로고 뒤를 주책없이 따라나온 <헤븐>의 쩌렁쩌렁한 예고편에 아연실색했다. 일부 의협심 강한 기자들이 정신을 수습하고 야유를 보냈지만- 일부 몰지각한 기자들이 하비 와인스타인(미라맥스 대표)의 수완에 감동하는 동안- 곧장 시작한 <풀 프론탈>은 소요를 잠재웠다. 하긴 불평을 미루고 집중하는 편이 관객에게도 현명했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의 비공식 속편 <풀 프론탈>은, 앞섶을 풀어헤친 제목과는 딴판으로 여러 겹의 관계, 여러 겹의 현실을 겹쳐놓은 영화라 따라잡기 만만치 않다. 성적·심리적 접촉에 대해 노이로제를 앓는 LA의 일곱 남녀가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거스의 생일파티에 모이기까지 연쇄적으로 맺는 관계를 24시간 동안 엿보는 <풀 프론탈>은 <플레이어>의 구역에 잠입한 <숏컷>이라 할 만한 영화다. 그러나 <풀 프론탈>의 이야기 구조와 편집에는 로버트 알트먼표 앙상블의 밀도와 박력이 없다. 거칠고 느슨한 디지털 촬영도 여기서는 미학적 미덕이기보다 영화의 결점을 악화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소더버그는 2년 전 베를린영화제에서와 다름없이, 티셔츠 차림으로 어느 배우도 대동하지 않은 채 기자회견장에 나타나 사방에서 날아오는 질문을 혼자 유유히 상대했다. 일정하던 소더버그의 톤은 “<풀 프론탈>이 <트래픽> <오션스 일레븐>의 성공에 힘입어 만들어진 감독 자신만을 위한 영화냐?”는 질문에 별안간 튀어올랐다. “그게 나쁜 건가? 나의 모든 영화는 내 자신을 위해 만든다. <풀 프론탈>은 <트래픽> 개봉 전, <오션스 일레븐> 촬영 전에 이미 마음속에 있었던 프로젝트다. 그런 사고방식은 영화 한편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논리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다.” 2000년 베를린영화제에 와 <오션스 일레븐>을 촬영하고 있다고 전했던 소더버그는 이번엔 크리스마스에 개봉할 <솔라리스>를 편집 중이라고 했다. 이 워커홀릭의 안식년은 2003년이다. 8월30일 금요일모리츠 데 하델른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백전노장답게, 오래지 않아 이 영화제의 기억은 카탈로그만 남을 것이라고 달관한 듯 말했다. 하지만 아침부터 밤까지 정처없이 상영관 주변을 맴도는 관객과 기자에게 베니스의 기억은 무엇보다 하염없는 ‘줄서기’로 남을 거다. 극장 앞에서, 프레스센터에서, 공중전화 부스에서, 화장실 앞에서, 수상버스 선착장에서. 사람들은 말 그대로 이 줄에서 저 줄로 옮겨다니며 하루를 보낸다. 인내심 함양 이외에 영화제의 줄서기가 갖는 용도가 있다면 정보습득. 언어를 몰라도 언뜻 들리는 영화의 제목과 표정은 힌트가 된다.

<로저 다저>(Roger Dodger | 부문 비평가주간 | 감독 딜런 키드 | 출연 캠벨 스콧, 엘리자베스 버클리)는 그렇게 점찍은 영화. 도입부에서 <저수지의 개> 오프닝의 마돈나에 대한 장광설을 연상시키는 커피 테이블 ‘강연’을 벌이는 잘난 남자 캠벨 스콧이 바로 제목의 ‘뺀질이 로저’다. 성공한 뉴욕의 카피라이터 로저는 위악적인 지성과 언변을 그물삼아 밤이면 외로운 여인들을 포획하러 바를 전전한다. 그러나 남몰래 사귀던 상사(이사벨라 로셀리니)에게 버림받고 만다. 낙심한 그에게 16살의 순진한 조카 닉이 찾아온다. 총각 딱지를 떼겠다고 결심한 닉은 존경하는 삼촌에게 지도 편달을 청하고 둘은 야간 실습에 나선다. <로저 다저>의 카메라는 줄곧 히스테리컬하게 건들대는데 “관객은 프레임이 안정돼 있을 때는 화면의 테두리를 보지만, 테두리가 흔들리면 인물의 얼굴에 집중한다”는 것이 딜런 키드 감독이 회견에서 들려준 설명이다. 과연 감독의 뜻대로 <로저 다저>는 관객을 로저라는 도시 남성의 한 전형에 바짝 밀착시킨다. 그리고 캠벨 스콧의 연기는 그와 같은 근접조우를 감당할 만큼 견실하다. 믿을 수 없는 얘기지만 에이전트들의 벽에 가로막힌 이 초짜 감독은 무작정 시나리오를 들고 뉴욕 카페를 전전하다가 캠벨 스콧을 잡았다고 한다! 감투상감이다. 그나저나 끝없는 수다와 선제공격으로 자아를 방어하려는 유약한 남자에 관한 영화 <로저 다저>에 기자들이 반색하는 것은 혹시 동병상련의 정인가? 8월31일 토요일연인 칼리스타 플록하트(<앨리의 사랑만들기>의 앨리 맥빌)의 팔짱을 끼고 베니스에 당도한 의 해리슨 포드가 리도 섬을 출렁이게 했다. 스타 동반자를 둔 배우는 영화제로서는 최고의 손님일 성싶다. 할리우드의 톰 행크스, 해리슨 포드, 줄리언 무어, 존 말코비치, 유럽의 카트린 드뇌브, 밀라 요보비치, 이탈리아의 모니카 벨루치, 소피아 로렌 등 적어도 올해 베니스는 화려한 방명록만큼은 남부럽지 않은 잔치다. 오늘 상영작 중 이탈리아 언론의 지면을 점령하고 있는 영화는, 로베르토 베니니의 <피노키오>가 베니스 일정에 호흡을 맞추지 못해 생긴 이탈리아 국가대표 영화의 공석에 들어선 다니엘레 비카리 감독의 <최대속도>(Velocita Massima). 로마판 <분노의 질주>라고 할 만한 영화로, 프로모션 공세가 대단하다.

오후 3시. 스타의 광채와도, ‘질주’와도 전혀 무관한 클레어 드니의 영화 <금요일 저녁>(Vendredi Soir | 부문 업스트림 | 출연 발레리 르메르시에, 뱅상 랭동)을 봤다. 파리의 지붕 밑으로 카메라가 날아들면 한 여자가 이삿짐을 꾸리고 있다. 버릴 것과 간직할 것을 결정하는 생의 어떤 순간. 애인과 새 보금자리를 차리려는 그녀는 썰렁해진 집의 문을 걸고 저녁 초대를 받은 친구 집으로 차를 몰지만 파업으로 인한 정체로 발이 묶인다. 무위의 시간에 갇힌 여자는 마비된 거리를 한가롭게 배회하는 한 남자를 보고 차 안으로 청한다. 고요한 격정이 마음을 삼키고 두 사람은 파업으로 텅 빈 12월 파리의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서로를 껴안고 섹스 뒤의 허기를 피자로 채운다. 그리고 다시 평화롭고 혼곤한 잠. 영화는 먼저 일어나 혼자 추운 새벽 거리로 나선 여자의 찬란한 미소에서 멈춘다. <금요일 저녁>의 깨지기 쉬운 시간은 우미한 만연체 산문의 리듬으로, 여성의 시선과 촉각으로 그려진다. 특히 은밀한 대화를 나누듯 맞닿는 피부와 흔들리는 눈동자, 소스라치는 머리카락을 정밀묘사한 정사 시퀀스는 특별한 에로티시즘으로 스크린을 감전시켰다. 소년처럼 짧은 머리에 작은 새의 체구를 가진 클레어 드니는 “추운 파리의 거리에서 몇 안 되는 스탭과 홍차, 담배만 내 곁에 있던 그 시간에 갑자기 마술처럼 영화가 형상을 갖추어갔다”고 회상했다. 결코 공유할 수 없는 누군가의 은밀한 시간 속으로 친밀하게 초대받는 기적. 그것이 영화가 마술이라는 미신을 지탱한다. ▶ 베니스영화제에서 날아온 일주일 간의 영화일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