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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80년대 정서’로 오아시스를 파다
2002-09-10

“오늘밤 여기가 나의 ‘오아시스’다.”

8일(현지시각) 5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폐막식에서 감독상 수상자로 단상에 오른 이창동(48)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오아시스>는 ‘감독’ 이창동엔 세 번째 작품에 불과하다. 하지만 <초록물고기><박하사탕><오아시스>라는 짧지만 굵은 필모그래피를 통해,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리얼리즘 감독으로 자리잡았다.

1954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씨는 경북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한때 고교 국어교사로 재직했다. 82년 한 신문의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을 계기로 그는 <소지><끈><녹천에는 똥이 많다> 등 80년대 시대의 아픔을 녹여넣은 작품으로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다.

이씨는 93년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의 각본과 조감독을 맡으며 영화계에 뒤늦게 발을 들여놓았다. 오랜 친구인 문성근, 명계남, 여균동씨 등의 전폭적인 지지로 직접 각본을 쓴 <초록 물고기>로 97년 감독데뷔하게 된다. <초록물고기>는 박광수 감독으로부터 이어지는 한국 리얼리즘의 전통과 누아르라는 장르적 완성도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그해 한국영화계 최고의 수확으로 꼽혔다.

이어 99년 <박하사탕>에서 그는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며 80년대라는 시대가 파괴해버린 한 인간의 삶을 ‘잔인할 정도로’ 치밀하게 그려냈다. 이 작품은 ‘박하사탕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박사모)처럼 관객들의 능동적인 참여현상을 끌어냈다.

전과 3범으로 막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회부적응자와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의 사랑을 그린 <오아시스>에서 이씨는 “사랑의 원형질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씨 스스로는 “정말 순수한 멜로”라 강조했음에도 사회 속 인간을 관찰하는 이씨의 시선은 마찬가지로 빛난다.

이씨는 현장에서 ‘느리고 철저한 감독’으로 유명하다. <오아시스>도 촬영 10%가 진행된 뒤 “마음에 안든다”며 모두 뒤집고, 나비·비둘기·코끼리 등 영화의 판타지 표현에 실사촬영을 고집하기도 했다.

이제까지 이씨의 영화는 ‘한국의 80년대’라는 특수한 시대적 정서를 밑바닥에 강하게 깔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과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 영화”라는 이번 영화제에서의 평은 그가 시공간적 울타리를 뛰어넘어 보편성을 획득해가고 있을 보여준다.

한편 이날 수상은 한국영화로서는 <거짓말>(장선우), <섬>(김기덕), <수취인불명>(〃)으로 이어진 4년 연속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 진출 끝에 얻은 결과다. 80년대의 국제영화제 수상이 어느 정도 ‘동양 문화에 대한 신비감’과 ‘아시아 배려’가 작용했던 데 비해 90년대 중반 이후 이런 선전은 국제 영화계에서 한국영화의 작품성이 인정받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여러분들이 주시는 생명의 물을 마시고 다시 힘을 얻어 사막으로 떠나겠다”는 이씨의 여정이 어디로 이어질지, 이제 전세계 영화계가 주목하고 있다.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