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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여유? 극장에서 보내는 추석
2002-09-19

예전 한가위에는 이런 ‘설렘’이 있었다. 아이들은 1년에 한두번 받아보는 새 옷을 입고, 부엌에선 전 부치는 고소한 기름냄새에 마음이 들떴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이는 친척들의 왁자지껄함은 또 어떠했던가. 그런데 최근 한 조사에선 기혼여성의 90%, 기혼남성의 75% 이상이 명절을 앞두고 스트레스를 느낀다고 했다. 명절이 누군가의 스트레스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면 온전한 기쁨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한가위엔, 이런 ‘설렘’을 기대하면 어떨까. 회사원 문성원(42)씨는 오전에 차례를 지내고 남·녀가 얼른 설겆이를 해치운다. 그리고 성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함께 보러 갈 영화를 머리를 맞대고 고른다. “작전명: 집안에서 쌓인 스트레스, 극장에서 풀기!”

나! 사랑에 젖고 싶다

한가위 연휴를 맞아 화제작이라 할 만한 영화들은 이미 지난주까지 대충 풀린 상태다. 특별한 강자없는 한가위 극장가에서 돋보이는 완성도를 갖고 있는 작품은 지난 8월 중순 개봉해 ‘롱런’하고 있는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와 지난주 개봉한 샘 멘디스 감독의 <로드 투 퍼디션>이다. 훌쩍 다가온 가을에도 잘 어울리는 영화다.

<오아시스>는 전과 3범 출신의 사회 부적응자 홍종두(설경구)와 중증 지체장애인 한공주(문소리)의 바닥깊은 사랑 이야기다. 세상의 편견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나는, 우리는 저런 사랑을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에 깊이 젖게 한다.

갱스터 장르이지만 <로드 투 퍼디션>에선 진한 부성애를 느낄 수 있다. 1930년대 금주령이 내려졌던 미국이 배경이다. 조직원인 아버지(톰 행크스)의 살인 현장을 목격한 아들이 위협을 당하자, 아버지는 조직과 두목(폴 뉴먼)에 맞선다. 전작 <아메리칸 뷰티>에서 미국 중산층 가족의 해체를 냉정하게 그려냈던 감독은 무너져가던 미국사회와 아버지의 뒷모습을 연민의 시선으로 그려냈다.

풋풋한 젊은 시절의 사랑이 그립다면 차태현, 이은주, 손예진 주연의 <연애소설>이 있다. 현재와 5년 전을 오가며 이름과 편지에 얽힌 첫사랑의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가는 이 영화는, 어디서 본 듯한 스토리의 반복이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맑은 영상이 젊은 날의 추억을 자극한다.

나 즐기고 싶다

경계없는 현실과 가상현실을 논하는 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게임을 옮겨온 듯한 화면과 액션이 새로운 영화다. 사랑하는 오락실 소녀 희미와 똑같은 성냥팔이 소녀(임은경)로부터 라이터를 산 중국집 배달부 주(김현성)가 게임에 접속한다. 성냥팔이 소녀를 죽게 하되, 죽기 직전 그의 사랑을 얻으라는 게 미션이다. 여전사 ‘라라’로 변해 현란한 싸움솜씨와 코믹한 연기를 동시에 보여주는 조선족 출신 진싱은 가장 많은 웃음을 주는 캐릭터다.

지난주 개봉한 <가문의 영광>은 주말 관객 60만명을 동원하며 흥행조짐을 보이고 있는 영화다. 조폭 집안의 외동딸(김정은)이 엘리트 출신 벤처사업가(정준호)와 한 침대에서 깨어나며, 집안의 세 오빠가 엘리트를 ‘가문’에 끌어들이기 위한 작전에 나선다. 남성중심적인 발상 진부한 웃음 뿐이지만, 배우들의 재치있는 연기는 돋보인다.

<버추얼 웨폰>은 수치, 자오웨이, 모원웨이라는 홍콩의 ‘미녀 삼총사’를 앞세워 오는 20일 개봉한다. 억지스런 대결과 화해가 거슬리지만 서구 영화 뺨치는 시원한 액션이 볼거리.

영화적 화면을 즐기고 싶다면 <레인 오브 파이어>도 괜찮다. 서기 2020년 수십억년 만에 잠에 깨어난 익룡들에 의해 파괴된 지구가 배경이다. 깊은 주제는 없지만, 거대한 스케일의 화면과 함께 실감나는 괴물 모습과 살아있는 캐릭터가 볼거리다.

나의 길을 가련다

오는 20일 개봉하는 <임포스터>는 대표적인 공상과학 소설 작가 필립 K. 딕의 유명한 동명의 단편(1953년)을 원작으로 한 영화. 서기 2079년 외계인과 전쟁중인 지구엔 보호막인 전자기막이 쳐져 있다. 과학자인 스펜서는 지구를 지키는 결정적 기능을 연구한다. 그러나 외계인의 스파이 로봇이란 혐의를 받게 된다. 감독·배우의 명성이나 제작 규모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비할 바가 못되지만, 오히려 ‘정체성의 혼란’이란 원작자의 색깔을 제대로 드러내, 이번 한가위, ‘찾아보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 될 것 같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개봉하는 <둘 하나 섹스>는 진한 섹스 장면 등을 통해 사회에서 일탈한 이들의 쓰러지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지나친 관념성 때문에 등급보류 위헌결정을 이끌어낸 ‘역사’를 확인하는 데 만족해야 할 듯 하다.

유일하게 꼬마들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는 20일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파워퍼프 걸> 뿐이다. 괴력을 가지고 하늘을 나는 유치원 세 소녀의 모습을 독특한 그림체로 그려냈다.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