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News > 국내뉴스
부모잃은 자매 웃어도 웃는게 아니지 <작별>
2002-09-25

낡은 사진첩 속의 얼굴들이 행복하게 웃고 있다. 모노톤의 인물들에 색이 입혀지며 영화가 시작된다.

사진첩 속의 단란하던 일가는 갑자기 닥친 자동차 사고로 산산조각 난다. 부모와 막내를 잃고 세상에 내던져진 열일곱 살의 메메(잉그리드 루비오)와 여덟 살의 아네타(히메나 바론) 자매는 고향인 아르헨티나의 빌라 빅토리아를 떠나 두 고모가 살고 있는 우루과이로 간다. 사고로 평생 다리를 절어야 하는 메메는 고향을 떠나며 “이 빌어먹을 동네에 다신 오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아홉 살 터울의 메메와 아네타 두 자매는 나이 차이만큼이나 행복했던 지난 시절을 추억하는 방식이 다르다. 아네타는 늘 가족 사진첩을 끼고 다니며 펼쳐보는 게 일이다. 그럴 때마다 언니 메메는 “사진 좀 그만 봐, 다 죽은 사람들이야!”라고 구박한다. 언니로서 엄마 노릇을 대신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메메에겐 오히려 과거를 직시할 힘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메메는 아기를 낳는 게 소원이다. 추억의 힘에 기대 살아가느니 빨리 사랑을 찾고 아이도 낳고 새로운 삶을 가꾸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이웃 청년이든 유부남이든 무모하리만치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메메의 구애는 늘 상처만 남기고 실패로 끝난다.

“불완전한 채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게 인생”이라는 메메의 말처럼, 영화는 너무 어린 시절 남다른 상처를 안은 두 자매가 세상을 배워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 고모네 집에 얹혀 살다 우연히 만난 엄마의 친구 돌로레스(노르마 알레안드로) 덕분에 새로운 희망과 즐거움을 맛보지만,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메메는 유산을 경험하면서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해 술과 담배로 스스로를 학대한다. 사고 때 폐 하나를 잃은 메메에게 흡연은 자살행위와 같다.

영화 속 인물들은 거의 모두가 자기 속내를 감추려는 듯 미소를 짓고 있다. 특히 메메의 밝은 미소는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신산함을 알아버린 주인공이 복잡한 내면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다. 마지막 자막이 뜰 때 나오는 노래 호안 마누엘 세라트의 <내가 기억하는 작은 것들>은 영화를 보며 감상에 젖길 즐기는 팬들의 눈시울을 적시기에 충분히 애닯고 서정적이다.

지난 96년 산세바스찬 영화제에서 스페인 영화 <가을의 태양>으로 주목을 받은 에두아르도 미뇨냐(62)는 소설가로 출발한 아르헨티나 감독. 지난 83년 <에비타, 민중의 소리를 들으려 했던 그녀>란 작품으로 데뷔한 뒤 텔레비전 프로듀서로 경력을 쌓았다. <작별>(원제는 ‘남쪽의 등대’)은 그의 98년 작품으로, 스페인어 영화권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인 고야상 최우수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7일 개봉.

글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