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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에 관한 기억과 건망
2002-10-02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기억 하나. ‘진보’라는 단어를 태어나서 처음 접한 것은 이른바 ‘진보당 사건’이다. 대통령 후보까지 지낸 조봉암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무시무시한 사건 말이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나이에 이런 사건을 알게 된 것은 이걸 담당한 ‘사상검사’가 우리 동네의 단골 국회의원 후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진보’라는 단어는 평생 입에 담지 말아야 할 섬뜩한 것으로만 생각했다. 한자를 공부하고 나서 진보가 ‘나아갈 진(進), 걸음 보(步)’라는 것을 알고 나서 ‘앞으로 나아가는 게 뭐가 나쁜 걸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건 억제해야만 했다. 사회 분야에서 진보라는 것은 금단의 열매 같은 것이었다. 물론 억제할수록 호기심은 더욱 커져갔고, 그런 호기심을 충족시키다가 나의 20대가 흘러갔다.

기억 둘. 10대 후반 시절 즐겨보던 <월간팝송> 같은 음악 잡지에는 ‘프로그레시브 록’(progressive rock)이라는 용어가 종종 등장했다. 핑크 플로이드, 무디 블루스, 킹 크림슨, 프로콜 하럼 등 1960∼70년대를 풍미한 록 밴드들이 그 주인공이었다는 말은 사족일 것이다. 영어 사전을 뒤져서 ‘progressive’가 ‘진보적’으로 번역된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그래서 ‘프로그레시브 록은 불온한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프로그레시브 록을 하던 뮤지션들 일부는 백만장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뜨악했던 기억도 난다. 그래서 내가 얻은 교훈이 있다. 문화·예술 분야에서 진보라는 개념은 잘 적용되기 힘들다는 점이 그것이다.

기억 셋. 대학교와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Progress’는 영어본 서적을 발행하는 출판사의 이름이었다. 진보 출판사? ‘Progress’에서 나온 서적은 원본이 아니라 ‘영인본’이었고, 쉽게 말하면 ‘불법 복제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름 아니라 출판사의 국적이 국제적 저작권 협정을 맺을 길이 없는 나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소련’이라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내가 구입하여 읽은 책들은 지금 가뜩이나 비좁은 내 서재의 한구석에 어지러이 처박혀 있다. 이로부터 얻은 교훈은 사상·이론면에서 진보란, 자처(自處)하거나 내세울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렇다고 인정해준다면 모를까.

기억 넷. 서른이 넘어서 펑크에 관한 문헌 몇개를 읽었다. 그중에서도 펑크 운동을 면밀하게 조사한 그레일 마커스(Greil Marcus)라는 이단적 비평가의 한 서술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있다. 그에 따르면 펑크 운동은 서양사회의 이런저런 신비화(mystification) 메커니즘을 공격했고, 궁극적 공격 대상은 “서양사회의 배후에 있는 궁극적 신비화인 진보라는 개념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언젯적 이야기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테고 나 역시 펑크 운동을 신비화하는 사람은 아니다. 단지 이때 얻은 교훈은 ‘진보를 반대하는 것이 무조건 보수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나서 혹시 진보란 기본적으로 서양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품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몇년 동안 ‘진보적’이라기보다는 ‘대안적’으로 살고자 노력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가열차게 투쟁하기보다는 지배적 흐름을 유유히 거스르면서 살고 싶었다. ‘제3의 길’ 어쩌고 하면서 극단 사이에서 어설픈 절충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극단의 대립 자체를 무효화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극단의 충돌이 반복되는 현대 세계에서 하나의 극단에서 정답을 찾기보다는 극단들 사이를 가볍게 유영하면서 삶의 새로운 방식,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30대가 흘러갔다.

이런 싸움(이라면 싸움)이 얼마나 유효했는지는 내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진보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가 종종 허무나 도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도 앞으로 싸워나가야 할 문제일 것이다. 이렇게 다짐하는 동안 이 지면에서 나의 역할도 끝이 나고 있다. 그 싸움이 진지했는지 허접했는지, 유쾌했는지 불쾌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필자였던 나로서는 그저 그동안의 모든 어설픔과 치졸함에 양해를 구할 뿐이다. 이만 총총. 신현준/ 칼럼니스트 http://homey.compu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