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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의 오!컬트 <도니 브래스코>
2002-10-02

난 그를 여전히 좋아한다

<도니 브래스코>를 쓰기로 맘먹고 비디오를 빌려다 틀기 시작한 순간 경악했다. 극장에서 봤을 때 밀려오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어 극장 화장실에서 질질 짜기조차했던 나였다. 아직도 알 파치노가 죽으러 가기 직전 시계며 금붙이 따위를 서랍에 챙겨두던 모습이 선하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알 파치노가 도니 브래스코인 걸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니 브래스코를 연기했던 주인공 조니 뎁은 출연했던 사실조차 까먹고 있었다(어디 가서 이 영화이야기 꺼내지 않았길 다행이지, “<도니 브래스코>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도니 역의 알 파치노 연기는 정말 끝내주지 않아요?”라고 나불댔다면 얼마나 개망신이었겠는가).

맞다. 나는 순전히 알 파치노 때문에 이 영화를 감동적으로 본 것이다. 알 파치노에 대한 감동이 지나쳐 제목이 곧 그이라고 믿어버리게 된 것이다. 알 파치노야 마피아의 보스에서 길거리 생양아치까지 색색깔의 깡패 연기를 다했지만 나에게는 <도니 브래스코>에서 래프티 역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래프티는 삼류 깡패집단에서도 늘 물먹는 넘버3 양아치다. 눈앞에서 자신보다 아래서열의 똘마니가 버젓이 넘버투로 올라가는 모습을 망연히 봐야 하는 처지다. 그러나 그는 노골적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동료들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잘난 척을 한다. 그에게는 깡패의 기본적 자질이 없다. 하긴 그는 어떤 일을 해도 성공하긴 힘들 사람이다. “도니에게서 연락이 오거든 상관없다고 전해줘. 누구든 상관없다고. 난 그를 여전히 좋아한다고”라고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이해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이와 우정을 나누는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힘들다.

깡패영화에서 래프티같이 모자란 인물은 드물지 않게 나온다. 그러나 래프티가 그다지도 매력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알 파치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얼굴엔 언제나 예견된 파국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다가올 불행을 읽고 있는 것 같다.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순간에도 망막에는 피로와 번민, 회한 같은 게 섞여 있다. 알 파치노의 이런 모습은 갱스터를 연기하지 않았던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악당을 쫓는 집요한 형사를 연기한 <히트>나 담배회사의 검은 음모를 파헤치는 프로듀서 역이었던 <인사이더>에서조차 그의 승리는 성취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악당을 잡고 추악한 음모를 폭로해도 세상은 좋아지지 않을 거라고, 별수 없을 거라고 말하는 듯하다.

래프티는 3만달러를 갖고 이곳을 뜨라는 도니의 제안을 거절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다른 배우가 연기했다면 미련하도록 우직한 모습으로 안타까움을 자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알 파치노의 래프티는 가봤자 별수있겠나, 어차피 내 뜻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인생인 걸 하는 식이다. 안타까운 게 아니라 쓸쓸할 뿐이다.

사람들은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를 자주 비교한다. 둘 다 탁월한 연기자이면서 연기 스타일이 극단적으로 대비돼 그런 비교들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두 사람을 떠올리면 나는 두 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민주당 후원행사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볼을 꼬집던 자신만만한 로버트 드 니로와 어느 파티장에서 구석에 처박혀 바닥만 내려보다가 집에 간 알 파치노(후자는 기사로 읽었는데 그는 무지하게 부끄러움을 탄다고 한다). 배우와 인간을 연관시켜 생각하는 것처럼 바보 같은 짓도 없겠지만 이 대조적 그림조차 두 사람 중 알 파치노를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남는다. 김은형/ <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