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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의 <오아시스> 비판론(5)
2002-10-05

안전한 환상,혹은 비겁한 위로

왜 홍종두는 환상에 응답하지 않는가?

거기에 덧붙여 그 예외가 만들어내는 또 다른 고백. 신82 카센터에서 홍종두가 한공주에게 어젯밤 오아시스 양탄자에 관한 꿈 이야기를 해주고 난 다음 84신 청계고가도로 위에서 교통체증에 밀려 차가 멈춘다. 그러자 홍종두는 한공주를 데리고 나와서 껴안고 춤을 춘다. 그런데 이 장면은 공주의 얼굴에서 클로즈업되어 신85 공주 방에서 인도 여인과 소년, 그리고 코끼리가 나오는 환상장면으로 이어진다. 이 장면은 홍종두의 유일한 환상인지 아니면 한공주의 환상인지 불분명하다. 다만 영화적으로만 설명하면 공주의 클로즈업에서 이어지기 때문에 그녀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홍종두의 마술은 항상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만 이루어진다(신66에서 그녀 방에서 그림자를 없애는 것은 실패하지만. 신69에서 전화를 통해 부리는 마술은 성공한다). 한 가지 더. 홍종두의 마술은 무언가 나타나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게 하는데 있다. 신86은 종두가 카센터로 혼자 돌아온 장면이다. 이 환상이 특별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다른 세개의 환상과 달리 양탄자에 담긴 그림의 비실재적인 대상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며(코끼리, 인도 여인과 소년), 다른 하나는 공주의 방 안에서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내용이 홍종두의 꿈이 한공주의 환상 안에서 실현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공주가 완전히 홍종두의 놀이 안으로 끌려들어왔음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장군과 공주마마의 놀이가 홍종두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음을 생각해보라). 그러나 동시에 이 장면은 결국 홍종두의 놀이가 지닌 무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청계고가도로에서 홍종두가 한공주를 껴안고 소리치는 장면은 한공주에게 무엇을 해주었느냐가 아니라, 그 반대로 무엇을 해줄 수 없느냐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홍종두와 한공주의 데이트는 항상 실패의 기반 위에서 서 있는 것이다. 음식점에서 쫓겨나고, 청계고가도로에서 차는 밀리고, 어머니의 생일잔치에 가서 가족들을 모두 불편하게 만든다. 여기서 홍종두의 꿈과 한공주의 환상이 겹치는 대목은 그것이 완전히 비실재적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나머지 세개의 환상은 모두 한공주가 떠올린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이창동이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자기 자신도 모르게 홍종두의 꿈과 한공주의 환상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비실재적인 것임을 서둘러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 이 장면의 수수께끼가 놓여 있다. 왜 서둘러 그것이 비실재임을 드러내야만 했을까? 이 영화 전체에 잉여처럼 버티고 선 이 기이한 환상은 단 한 가지 이유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장면은 청계고가도로에서 홍종두와 한공주가 벌이는 그 알 수 없는 행동의 내면이 사실은 공주의 방 안에서 코끼리와 인도여인과 소년과 함께 뛰놀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바로 당신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그것을 보는 당신의 자리가 비실재의 꿈과 환상이 교차하는 바로 거기, 그 아슬아슬한 자리라는 것을, 새삼 환기시키는 것이다.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이것은 오직 당신만을 위해서 상연되는 환상이다.

여기서 한공주의 환상은 홍종두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가장 중요한 것. 왜 끝내 홍종두는 한공주에게 환상으로 응답하지 않는가? 그가 한공주에게 환상으로 응답하는 순간 이 영화는 부서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홍종두를 한공주의 환상 속의 주인의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서 모든 것이 배려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항상 한공주는 홍종두를 위해서 그녀의 환상을 바친다. 아무리 말을 바꾸어도 이 영화는 잘 짜여진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이다. 실제로 <오아시스>는 그 말을 지루할 정도로 계속해서 반복하는 영화이다. 그런데 그게 질리지 않는 까닭은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홍종두는 좀더 숭고한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

윤리적으로 바른, 정치적으로 바르지 않은

사실 가장 우스운 대목은 신60 종두의 집 앞에서 그의 어머니와 형수가 목사님과 마주칠 때이다. 시나리오상으로 목사님은 신117 경찰서에서 홍종두로 하여금 수갑을 풀고 도망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기 위해서 ‘미리 등장하는’ 사람이다(마지막 대목에서 홍종두를 탈출시켜주기 위해 갑자기 목사님이 나온다면 얼마나 이상하겠는가?). 그러나 목사님은 기능적으로 등장하지만 홍종두에게만 등장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홍종두가 목사님과 마주치는 것은 신56에서 공주에게 용서를 받은 다음 그녀로부터 ‘장군’의 자리를 인정받은 직후이다(그리고 두 사람은 옥상에 올라간다. 신60은 그날의 연속이다). 다음 장면(신61)은 홍종두가 형의 카센터를 찾아가 일을 배우고 싶다고 부탁하는 장면이다. 이 대목은 경찰서에서 도망치는 홍종두가 그 구절을 다시 한번 외우는 것으로 반복된다(신118 종두의 대사 “아버지 하나님, 당신의 어린 양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불쌍한 어린 양을, 불쌍한 어린 양을, 불쌍한 어린 양을, 불쌍한 어린 양을 구원하소서”). 홍종두가 정말 기독교를 믿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걸 보는 우리는 홍종두의 행위에서 성자 같은 순결함을 다룬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홍종두는 자기 의지로 목사님에게 말씀을 청해 들으며(신60),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불현듯 깨달았다는 듯이 달려나가(신117) 한공주의 집 앞에서 그녀를 무섭게 만들면서 잠 못들게 만드는 나뭇가지를 잘라버리기 때문이다(신125에서 127까지). 영화는 자꾸만 거기 있지도 않은 깨달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희생적으로 실천하는 홍종두의 모습 속에서 그가 결국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돌아오게게 되리라고 믿게 된다. 기이한 성자의 내면화. 이 모든 것을 가로지르는 환상은 이상한 방식으로 의사소통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홍종두가 나무를 자르는 행위를 형사들은 이해하지 못한다(신125 형사 “야 임마 너 밤에 거기 올라가서 뭐하는 거야. 응?”). 반면 공주는 홍종두가 이 밤에 어떤 깨달음 때문에 달려왔는지 알지 못한다(공주가 창문의 나뭇가지 그림자가 무섭다고 말한 것은 신66이다. 그런데 홍종두는 ‘이제야’ 자른다). 그 사이를 매개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홍종두가 경찰서를 탈출하면서 네번이나 절규하듯이 외치며 반복하는 “불쌍한 어린 양”). 그 순간 홍종두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한공주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며, 그 숭고한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용서하는 것이며, 그것만이 자기가 그녀 앞에 돌아올 수 있는 길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 구원의 서사를 모두 볼 수 있는 자리는 오직 당신, 화면의 편집 바깥에서 시간 순서대로 질서정연하게 전개되는 영화를 보는 당신의 자리밖에 없다. 여기에 바로 홍종두가 끝내 자신의 행위가 강간이 아니며, 한공주가 결국 그것이 강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또는 기어이 경찰서를 탈출해서 나뭇가지를 자르러 가는 이유가 생겨난다. 홍종두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대신 더 많은 죄를 저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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