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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의 <오아시스> 비판론(4)
2002-10-05

안전한 환상,혹은 비겁한 위로

한공주를 위한 장군만들기

우리는 이 영화를 다시 돌이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아시스>는 심각한 테마를 껴안은 영화가 아니라, 그냥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잊어버린 걸 일깨워주는 계몽영화이다. 그걸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이창동 자신인 것 같다. 자꾸만 어마어마하게 질문하는 조선희씨에게 그는 인터뷰에서 말을 마치면서 대답한다. “실제로 나는 모범생 계열이에요. 나는 긍정적으로 발언해요. (중략) 내 영화의 전략이 뭐냐, 어찌 됐건 건전하게 출발한 영화인데, 진지한 영화인데 흠잡기 힘들잖아. (웃음) 농담이지만 진담이지. 나는 긍정주의자이고, 낙관주의자이고, 이상주의자이고, 인간을 믿으려 하고. (중략).” 나는 그 대답이 진담이라고 생각한다) <오아시스>는 세상에 버려진 인간 홍종두를 따라서 세상에 문제를 일으키는 그 모습을 따라가다가 불현듯 이 장면에서부터 홍종두를 계몽시키는 데 바쳐지기 시작한다. 주어였던 홍종두가 목적어가 되는 순간 그의 의지는 사라지고, 그를 움직이는 운명의 의지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그걸 당신은 하여튼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이 당신의 자리에서 버텨보겠다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버티면 당신은 더이상 영화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러워하지 마라. 당신을 위한 자리는 훨씬 더 중요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신39 다음이 중요해진다. 이 사건이 벌어지고 난 다음 둘이 다시 만나기 전까지 두 사람을 진술하는 방식은 아주 기묘하다. 홍종두는 자기가 벌인 일에 대해서 단 한 숏도 반성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집에 가서 늙은 노모를 모시고 묵찌빠를 한다(신42). 이 무서운 남자는 갑자기 다음 장면에서 어린애가 되어버린다. 뇌성마비 장애자를 강간미수한 홍종두의 인간적인 모습? 그 사이에 한공주는 두개의 신을 겪어야 한다. 하나는 옆집 아줌마와 일나갔다가 보신탕 먹고 와서 대낮에 섹스하는 아저씨를 문 하나 건너에서 ‘들어야 하는’ 한공주의 모습이다(신44). 이 장면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을 아주 이상한 자리에 가져다놓은 것이다. 나는 이 신이 다른 자리에 있었다면 (그녀의 비참한 환경이긴 하지만) 얼마든지 웃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홍종두가 강간을 하려다 실패하고 도망친 장면 다음에 어린애처럼 어머니와 묵지빠를 하는 홍종두에 이어 붙여서 바로 뒤에 이 신이 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한공주의 섹스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기 위한 것이며, (물론이다. 뇌성마비 장애자도 섹스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은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홍종두가 바로 한공주, 당신의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라고 부추기기 시작한다. 나는 이 신의 편집방식이 정말 끔찍하다), 슬그머니 그녀에게 섹스의 권리를 일깨우는 척하면서 홍종두를 용서할 수 있는 역설적인 논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뒤이어 한공주의 오빠 한상식의 내외가 와서 그녀를 데리고 이사간 장애자 임대아파트에 데려가 (명의만 빌려 가짜로 입주한 사람들, 바로 한공주의 오빠 같은 사람들을 적발하기 위해 방문한) 동사무서 직원을 눈속임하고 다시 원래의 의정부 시민아파트에 데려다놓는다(이 대목은 짧지만 데리러 온 장면, 동사무소 직원을 눈속임하는 장면, 다시 데려다놓는 장면을 모두 꼼꼼하게 찍었다). 이 장면은 몇 가지 진술을 하는데 우선 한공주를 그녀 오빠 내외가 한편으로는 이용하지만, 동시에 그녀와 함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오빠가 아니면 그녀를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문장을 하나로 합치면 그녀를 돌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오빠마저 그녀를 이용하고 있는 지금 한공주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누구냐고 우리게 물어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마침내 53신이 성립된다. 강간당할 뻔한 그녀가 먼저 전화를 건다. 저 잔인하게도 막다른 골목에 밀어넣은 다음 베푸는 자비, 또는 우선권을 가장한 자포자기.

기만의 환타지, 자아를 무아지경에 빠뜨리다

만일 여기까지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나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부터 영화는 갑자기 동화가 된다(신56 공주의 아파트). 그렇기 때문에 저 닭살 돋는 대화조차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한공주를 ‘공주마마’의 자리에 가져다놓고, 홍종두를 ‘장군’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그들은 무엇을 얻은 것일까? 이창동의 환상은 사회적 현실 전체가 지니고 있는 (홍종두와 한공주에 대한) 사악한 구조를 환상으로 놓는 대신 현실의 자리에 갖다놓고, 그 반대로 그 사악함을 일깨워야 할 자아를 환상의 무아지경으로 빠트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회가 갖고 있는 홍종두와 한공주에 대한 태도를 그냥 인정할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기만의 판타지라는 숨바꼭질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환상이 실재의 자리를 차지하고, 실재가 환상에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홍종두와 한공주의 사랑은 서로에 대한 서로의 기만으로 시작한다. 그들이 속이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그들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현실에 대해 눈을 감는 것이다. 그렇게 홍종두는 한공주를 ‘공주마마’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서 자기를 ‘장군’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실재 속에서 비천하고 남루한 그들이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들 스스로의 자리를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 스스로의 자리를 가장 고상한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서 생겨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난처한 논리와 마주친다. 홍종두와 한공주가 착하고 순진하기 때문에 시련을 겪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홍종두와 한공주를 따라가면서 보아야만 세상의 사악함을 볼 수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런데 그 깨달음은 환상 안에 있는 것이다. 이크!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점. <오아시스>에서 정말 환상이 필요했을까, 라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 전체가 사실상 홍종두와 한공주의 환상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장군과 공주마마 놀이), 그것을 구태의연하게 기어이 장면으로 보여줄 때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어리둥절했기 때문이다(처음 보았을 때 이 대목들이 대부분 이상하게 보였다). 이 영화의 환상장면들은 환상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은 있지만 나가는 장면이 없다. 말하자면 항상 이 숏들은 현실 안으로 환상이 침범해 들어오는 장면으로 시작해서(항상 갑자기 한공주는 벌떡 일어나서 프레임 안으로 우리를 놀라게 만들면서 슬그머니 들어온다) 현실의 숏으로 넘어오지 못하는 컷으로 끝난다(그래서 한공주가 장애자로 돌아가는 장면은 환상이 잘려나가도록 편집되어 있다). 이건 이상한 일이다. 또는 이것이 이 영화가 이끄는 대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영화를 보는 방법이다. 이창동은 현실이 환상에 자리를 양보하기 바라지만, 그 환상 안에 현실이 개입하여 우리를 일깨우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이 깊은 잠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 실제로 홍종두는 끝내 한공주의 환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 안에서 한공주의 유일한 환상은 그녀가 뇌성마비 장애자로부터 정상인이 되는 것이다(또는 비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다. 영화에는 한공주가 홍종두의 곁에 가는 환상의 장면들은 있지만, 그 반대의 장면은 없다. 그건 이유가 있다. 한공주의 환상은 항상 그녀가 사는 아파트 바깥에서만 이루어진다(신74의 전철 안, 신80의 종두의 카센터, 신99 전철역). 이 사실을 다시 생각해보자. 환상의 내용은 허위이지만, 그것이 벌어지는 순간은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녀의 환상이 홍종두의 도움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홍종두의 도움없이 그녀는 외부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이 중요하다. 한공주가 그녀의 환상 안에서 홍종두의 머리를 물병으로 때리건, 아니면 “어떻게 나한테 화를 낼 수가 있어”라고 따지건, 또는 홍종두를 위해서 노래를 부르건 그 내용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홍종두는 한공주의 환상 외부에 있지만, 그는 그녀의 환상을 만들어내는 버팀목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공주의 환상이 우리에게 말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인정해야만 하는 그 안의 진실은 그녀가 자신을 포기하고 홍종두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추김이다. 환상은 당신에게 현실의 풍요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현실 안의 황량함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항상-결코-언제까지 충분치 않은 현실의 틈을 스스로 자기 자신을 기만하면서 채워넣는 형식이다. 그런데 그것을 채워넣기 위해서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것을 끌어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그 환상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녀는 자기의 자리를 버리고 홍종두의 빈자리 안으로 스스로 들어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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