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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의 <오아시스> 비판론(3)
2002-10-05

안전한 환상,혹은 비겁한 위로

동원된 환상, 동원된 순서 편집

여기서부터 그 순서를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신19에서 이사가는 공주의 오빠 내외를 본 다음 신20은 공주 혼자서 놀다가 갑자기 거울을 던져 깨트린다. 그런데 깨져서 산산조각난 거울에서 반사되는 빛이 나비떼가 된다. 신20에서 아파트 문 앞까지 홍종두가 과일 바구니를 들고 다시 찾아온다. 그러나 그는 벨을 누른 다음 멀찌감치 서서 문이 열리는지를 보고 그냥 간다. 그 다음 신은 부동산중개소에 그릇을 찾으러 왔다가 손님이 부르는 노래 “모두 사랑하네” 구절을 따라 부르는 대목이다(신24). 그리고는 중국집에 돌아오니 이미 모두 퇴근하고 난 다음이라 문이 닫혀 있다. 홍종두는 그 길로 공주의 시민 아파트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간다(신27). 그때 공주는 라디오를 듣고 있다(신28). 다음 장면은(신29) 홍종두가 도로에서 영화 촬영하는 차를 따라 달리다가 엎어진다. 이 장면들이 이상한 것은 왜 신19에서 다음 날 공주의 아파트를 찾아가는 신32로 바로 건너오지 못하는가, 라는 것이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뻔한 건데 바로 넘어오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장면들은 19신의 결과가 아니라 32신의 원인이기 때문에 처음 볼 때는 잘 붙들리지 않는다. 홍종두는 공주 집 앞에 한밤중에 다시 찾아간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영화 촬영차량을 따라간다. 그는 기분이 좋다. 홍종두의 행위가 미스터리한 것을 이해시키는 방법은 마치 한공주의 라디오가 율리시스를 불러내는 사이렌처럼 편집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공주는 홍종두를 유혹하는 중이다. 또는 이 말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한다면 하여튼 그 무언가가 자꾸만 홍종두를 한공주의 집으로 불러낸다. 영화는 홍종두의 행위에 앞질러서 그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한공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신20에서 신31까지를 모두 볼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다. 이제 당신은 이해하는 척하는 공범자이다. 또는 그렇게 편집되어 있다. 그렇게 쫓아갈 수밖에 없는 당신.

홍종두는 다음날 꽃을 사들고 한공주 혼자 사는 아파트를 찾아간다. 그는 우연히 만난 옆집 아줌마에게 거짓말을 하고(“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묻자 종두는 “꽃배달을 왔는데요”라고 대답한다), 심지어 초인종을 눌러서 허락받고 들어가는 대신 몰래 열쇠를 훔쳐서 열고 들어간다. 여기가 바로 꽃을 들고 종두가 혼자 남아 있는 공주를 찾아간 문제의 39신이다. 둘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는 뜻이 아니라 여기서부터 영화가 우리에게 믿음 전의 믿음이라는 기괴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이 영화는 사실상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영화이다. 그러나 이 장면을 첫 장면으로 시작하지 못한다. 또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신19에서 신32로 넘어오지 못한다. 이 장면을 아무리 다르게 말해도 결국은 강간하러 찾아간 장면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서 환상이 동원되고, 운명적인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복잡한 순서 편집이 동원된 것이다. 홍종두는 착한 사람이다. 그렇다. 나도 아니라고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옆집 아줌마에게 거짓말을 해서 자기 신분을 속이고, 열쇠를 훔치고, 분명히 혼자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신체가 자유롭지 못한 뇌성마비 여자를 찾아갔을 때 홍종두는 그녀가 너무 외롭고, 불쌍하고, 그래서 친하게 지내고 싶은 착한 마음으로 찾아간 것일까? 왜 홍종두가 이 집에 찾아오자 처음 한 행동이 이 문 저 문 열어보면서 다른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해보는 것이었을까? 분명히 거부 의사를 밝히고 있는데도 홍종두는 순진하고 착한 마음에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첫마디로 반말을 하면서, 다짜고짜 얼굴에 손을 대고, 한공주의 옷깃을 젖히면서 젖가슴에 손을 넣고, 자기 바지를 벗어 내리면서, 발버둥치면 뒤에서 힘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붙들고 “잠깐만, 이쁘지, 이쁘지, 잠깐만 있어봐, 씨발년아”라고 말한 것일까?(홍종두는 이게 처음이 아니다. 그가 ‘이미’ 단 별 세개 중의 하나는 강간미수이다. 그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또는 좀더 정확하게 이창동은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었다. 신11에서 무전취식하고 잡혀간 경찰서. 그리고 나중에 다시 환기시켜주기까지 한다. 신109의 경찰서 진술장면) 그게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면 기절한 공주를 깨우면서 왜 자기를 때리며 “이 씨발 새끼야”라고 자책했을까? 또는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도망쳐버린 것일까? 이 무서운 장면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홍종두의 나쁜 의도가 아니라 그에게 영화가 일깨우는 자리이다. 신39가 중요해지는 까닭은 이 아파트를 찾아간 홍종두가 한공주를 여자의 자리에 놓고 찾아간 남자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홍종두라는 예상하지 않았던 방문객-침입자를 맞이하는 한공주의 자리는 성별과 관계없이 인간의 권리에 대한 침범에 있기 때문에 그 대칭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한공주가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린 것은 홍종두의 섹스 때문이 아니라 폭력 때문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만이 그 자리에서 그녀가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 순간 여기서 나쁜 ‘남자’ 홍종두는 뇌성마비 ‘인간’ 한공주를 만난다. 왜 이렇게 만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렇게 만남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영화의 환상의 바탕에 있다. 너무나 그 순간의 쇼크가 크기 때문에 우리는 미처 이 영화가 여기서 갑자기 자기 입장을 바꿔버렸다는 사실을 놓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왜 홍종두를 그 자리에 가져다 놓아야만 했을까? 당신이 진짜 보고 싶은 장면은 물론 신56 공주가 홍종두를 불러서 ‘장군’이라고 부르고 ‘공주마마’라고 대접받는 장면부터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왜 안 되는 것일까? 처음 그들이 만났을 때 왜 그들은 공주마마와 장군의 놀이를 시작할 수 없었던 것일까? 현실은 동화 속으로 단번에 넘어가지 않는다. 이 미묘한 순간에 우리는 이제까지 이 영화를 보던 우리의 위치가 바꿔치기 당한 셈이다. 영화는 홍종두를 할 수 있는 한 가장 참담한 곳에 집어던진다. 그렇게 홍종두를 가장 비루한 자리에 가져다놓고 난 다음, 한공주의 면죄부를 통해서 그를 가장 숭고한 자리에 가져다놓으려는 착한 환상극을 통해 만들어내는 시작의 좌표는 홍종두와 한공주가 현실과 맞대면하면서 결국에는 세상 속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질문 대신 한공주를 경유하여 홍종두를 계몽하려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당신은 홍종두의 행위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홍종두를 계몽하기 위해서 한공주가 결국에는 어떤 자리로 가야 하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이 영화의 결정적인 위선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이창동의 영화에서 내내 반복된 과정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에서 항상 남자들의 영혼은 여자들의 희생없이는 정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들의 영혼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채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초록 물고기>에서 미애는 결국 무엇을 얻었는가? 또는 <박하사탕>에서 20년 동안 그 자리에서 유폐된 존재처럼 멈춰선 순임. 오직 영호를 일깨워주기 위해 불가능한 희생을 요구 당하는 바로 그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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