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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 <시경> 2002 창간호
2002-10-24

시의 농사꾼

홍일선은 80년,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폐간시키기 직전 <창작과 비평> ‘마지막호’로 나와 함께 등단한 시인이다. 신경림 전통을 잇는 새로운, 좀더 전투적인 농촌시인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강형철(시인·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은 그때 아무 생각없이 다음호로 밀렸다가 폐간의 철퇴를 고스란히 당하고 몇년이 지나서야 ‘신작 시집’ 출판물 형태로 등단했다. 단행본 혹은 ‘연간’ 무크지 형식으로 계간 역할을 대신한 ‘신작 시집’은 창비가 복간되기까지 몇 차례 더 나왔고 우수한 시인들을 많이 배출했지만 ‘신작 시집 등단’이란 말은 아무래도 어색하고, 자비 출판 오해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니 ‘시대의 부름에 응답’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홍일선과 나는 똑같이 턱걸이한, 운좋은 처지였으나 동시에, 그와 비교되는 것은 늘 ‘고초’였다. 당시 ‘민족’ 문단의 농민시 혹은 농촌 정서 선호는 정말 대단한 거라서 그는 모범적이고 교과서적인 시인이었던 반면 서울 출신에 고학력 소지자였던 나는 인간도 글도 마냥 ‘싸가지’였던 것. 그의 인품이 더없이 출중했으므로 사태는 더 심각했다. 화성 부농 출신으로 상경하여 싱싱한 우시장 내장을 가져다 음식점에 별미로 공급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그는 틈틈이 동료와 선후배 문인들에게 별미 중 별미를 술안주로, 혹은 보신용으로 베풀었고 일년에 한두번 그의 고향 들판에서 농익은 쌀막걸리(그러니까, 당시로서는 밀주)를 풀어 따스한 햇볕 바람에 취했다 깨어났다 다시 취하는 일은 곧 문단의 정례행사로 굳어졌고, 천진히 새하얗게 무르익은 그의 웃음은 한마디로 고된 가투의 시름을 말끔이 씻어주는 바 있었고, 그가 한꺼번에 전 재산을 사기당하고 급한 대로 독서실을 꾸려 입에 풀칠을 하게 된 경위는 오랫동안 문단 일반의 공분 사항이었다.

사람에 대한 실망이 워낙 컸는지 시 쓰기 활동이 매우 뜸하던 그가 좋은 벗을 만나 펴낸 이 잡지에 시단의 오랜 중추이자 글씨솜씨가 소문난 세 사람이 모두 휘호를 보탰다. 고은은 참 고운 필치로 ‘詩鏡’(시의 거울)이라 썼고 김지하는 ‘怪’의 필치로 ‘詩境’(시의 경지 혹은 경계)이라 썼고 김규동은 각고의 예술로 ‘詩耕’(시를 갈다)이라 썼다. 기로 꽉 찬 제자를 써낸 권영환은, 놀랍게도 손목 하나가 없다. 고은 대담은 문제적이고 김지하 시는 반갑고 김규동 회고는 흥미진진하다. 정현종-이성부 등 현역 최고 시인들이 신작을 보냈고 북한의 현대시들이 수록되었다. 나머지는 정말 시대의 부름에 응답한 시들. 이만한 축하를 받으며 창간된 책은 일찍이 없었다.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u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