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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로운 서사의 화폭에 사랑을 담아내다, 김혜린의 <불의 검>

김혜린의 <불의 검>이 세 번째 옷을 갈아입었다. 두툼하게 단단한 외양으로 무장한 2002년 판본(출판사에서는 ‘애장판’이라고 부른다)을 접하고 내친김에 기왕에 출판된 11권을 다시 읽었다. 돌아보면, <씨네21>의 초창기에 정준영이 쓴 <불의 검>에 대한 평문이 있다. 그때는 격주간 <댕기> 시절에 나온 판본이니 아마 8권으로 출간된 육영재단 판본을 보고 쓴 글이었을 것이다. 97년 1월에는 <불의 검>이 <댕기>의 폐간으로 연재가 중단된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출판사쪽은 세 번째 판본에 12권 완결본을 포함해 <불의 검>을 모두 완결한다고 했으니 이번 글 뒤로 완결편을 본 뒤 다시 후속글을 쓰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이렇듯 <씨네21> 지면만을 꼽아도 꽤 많은 조명을 받은 <불의 검>은 다시 읽을 때마다 깊이있는 서사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서사가 사라진 요즘 그래서 더욱 값진 작품이다.

인간 생명의 근원적 율동

<불의 검>은 청동기, 철기 교체기의 동아시아를 무대로 하고 있다. 강한 철검을 소유한 카르마키족은 아무르를 포타하슬라 지역에서 밀어내고 실카강 인근 포타하라무렌에 제2성도를 개척한다. 부족연합국인 아무르족은 철검의 제조방법을 배워 카르마키를 포타하슬라에서 몰아내고 옛 지역을 수복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서사의 씨줄이다. 날줄은 사람이다. 하라무렌강에서 구해낸 남자 산마로와 사랑하게 된 아라, 아라에게 집착하는 키르마키의 수하이바토르, 가라한 아사(산마로)에게 마음을 빼앗긴 키르마키의 신녀 카라, 아무르의 신녀 소서노에게 깊은 연모의 정을 갖고 있는 마리한 천궁, 아라를 사랑하게 된 노래하는 바리. 격변의 시기에 사람들은 운명적 만남을 한다. 잃어버린 기억과 만남, 납치, 탈출, 사랑을 위한 모든 것의 희생, 반란(폭군과 음모자), 어긋남의 오해, 납치, 되돌아온 기억, 각성, 대담한 시도 등으로 이어지는 세부플롯도 매력적이다.

첫 판본으로 <불의 검>을 읽었을 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아무르 어머니를 둔 키르마키인 수하이바토르의 아라에 대한 집착과 죽음이었다. 두 번째 판본으로 <불의 검>을 읽을 때 인상적인 부분은 모든 것을 품어주는 어머니 소서노와 분노를 앞세운 카라의 존재감과 발언들이었다. 특히 카라와 신딸들의 목숨을 건 연대는 비록 악인으로 등장하지만 오히려 연민의 정을 가득 느끼게 해주는 서글픔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판본으로 <불의 검>을 읽는 지금 나는 작품을 통해 인간생명의 근원적인 율동을 느낀다. 삶과 죽음, 사랑에 대한 원초적인 인간의 욕망을 읽는다. 아무르와 키르마키의 대결과 여기에 참여한 노회한 중원이라는 전략, 전술적인 구도보다는 사람과 자연이 하나되어 있는 거대한 생명의 연대감을 느낄 수 있다. 가라한이 각성하는 대목이나 소서노와 카라가 직접 전투에 개입하는 장면 등은 ‘판타지’라기보다는 오히려 더 근원적인 원시성을 드러내는 대목이었다.

작가는 이러한 원시성을 선의 율동을 통해 보여주기도 한다. 전체 작품을 통해 펜이나 톤을 빌리지 않고 순수하게 붓을 통해 그려진 선은 명암이나 원근과 같은 합리적인 관찰의 묘사가 아닌 직관의 묘사다. 광원의 위치나 양,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서 변화하는 명암이나 원근보다 선의 율동은 훨씬 더 본질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감정을 담아내는 선으로 붓선을 활용한다. 특히 전체를 붓으로 그리기보다 감정이 격해진 인물 등을 다른 이미지와 대조적으로 한두번의 붓터치로 끝낸다. 1권 309페이지에서 길게 4칸에 걸쳐 술을 마신 가라한 아사가 ‘천궁’을 부르고 난 뒤 가로로 긴 칸에 등장하는 천궁의 모습 등은 모두 붓선을 이용해 그려졌다. 자연스럽게 그 순간 칸을 타고 흐르는 감정선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여성만화’의 영역 확장하는 장대한 서사

<불의 검>의 연출은 주인공 하나를 드러내기보다 서사에 존재하는 사람, 사람에 존재하는 서사를 드러내는 데 주력한다. 삽입칸이나 칸의 외곽선을 지우고 페이지 끝까지 확장한 여성만화 특유의 연출기법이 낯익게 등장하지만, 캐릭터를 전체 화면에 클로즈업한 장면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전체 화면을 활용한 경우 인물을 롱숏이나 풀숏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주인공은 이야기의 맥락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캐릭터가 칸을 뚫고 올라오기보다, 칸이 캐릭터 위에서 연속된다. 주인공의 매력을 강조하기 위한 시각적 장치를 활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서서히 이야기 속에서 독자와 만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된다. <불의 검>을 어떻게 부를까. 역사만화 판타지 영웅서사시 장르적인 규정보다 소중한 것은 <불의 검>이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잃어버린 무언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약한 것들을 통한 생명의 연대, 올바름에 대한 믿음, 그리고 사랑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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