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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삐>의 `왕아줌마` 배우 이정표
2002-10-30

누구나의 엄마 같은, 질퍽한 우리 아줌마

“진짜로 전에 연기해본 적 없으세요” “없다니까. 난 집에서 밥만 했어.” <뽀삐>의 오디션장에서부터 개봉 뒤 심심찮게 마련되는 인터뷰 자리까지, 이정표씨는 자신이 ‘원단 전업주부’임을 강조 또 강조하고 있는 중이다. 전혀 연기 같지 않은 연기, 일상과 구별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연기의 신선함. 디지털독립장편영화 <뽀삐>에서 애완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는 아들과 옥신각신하는 엄마로 출연한 이정표씨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게다가 그것이 연기 경험 전무한 생짜 신인의 솜씨라는 걸 알고 나면,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리곤 안타까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한숨을 쉬게 된다. 이 아줌마, 대체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난 거야

올해 초, 기성·신인 불문하고 수십명의 아줌마 배우들과 만나고 헤어진 뒤 <뽀삐>팀은 망연자실해 있었다. 적임자를 만나지 못해서였다. 이진숙 프로듀서는 두달여간 어머니를 배우로 트레이닝시키는 등의 궁여지책(죄송합니다)까지 모색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다 에 15초간 스쳐 지나간, 낭랑한 하이톤의 음성, 심상치 않은 눈빛의 아줌마를 보고 ‘필’이 꽂혔다. 아줌마 닷컴에서 ‘이야기가 있는 요리방’을 운영하며 ‘왕아줌마’로 ‘추대’된 이정표씨의 사연이 방송을 탄 것이다. 출연 제의를 받은 이정표씨는 “사이비 영화사일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는 주위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나 데려다 무슨 야한 비디오 찍을 일 있냐”며, 아무 의심도 두려움도 없이 <뽀삐> 팀을 만나러 갔다. “대사 해보라고 그러기에, 그냥 아들이랑 얘기하는 것처럼 했더니, 너무 좋다는 거야. 당장 찍자고 하기에, 서두르지 말고, 더 잘하는 사람 찾아보라고 했지. 그랬더니 나 이전에 한 50명은 봤다고 하더라구.”

<뽀삐>에서 이정표씨가 연기한 ‘뽀삐 엄마’는 적당히 순수하고 적당히 속물스러운, 영화에선 희귀하지만, 현실에선 흔한, 그런 아줌마의 모습이다. 애완견을 업고 다니는 건, 그만큼 예뻐해서가 아니라 발 더러워지는 게 귀찮아서고, 죽어가는 애완견을 위한 기도는 ‘빨리 나으라’가 아니라 ‘좋은 곳으로 가라’는 것이다. 그 ‘뽀삐 엄마’의 캐릭터가 더욱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것은 이정표씨의 열연 덕이다. “다 내 딸 같고 아들 같은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게 너무 신나고 재밌는 거야. 힘든 거 별로 없었어. 젊어서 비서실에 근무했거든. 그래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 사람 좋아하고, 말하는 거 좋아하고. 커피 몇잔만 있으면, 밤샘 촬영도 곧잘 했어.” 유난히 우여곡절이 많았던 촬영 과정, 스탭들은 이정표씨를 “우릴 위로하기 위해 하늘에서 떨어뜨려준 사람”으로까지 믿고 감사했다.

오십대의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는 이정표씨는 그 열정과 패기가 웬만한 이십대 못지않다. 결혼과 함께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에 지난 30여 년을 보낸 데 대한 후회는 없다고 했다. “이젠 날 찾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만난 <뽀삐>는 자신을 재발견하게 해준 ‘보석’처럼 귀한 작품. “나이 육십이면, 인생 포기해야 하나 난 앞으로 남은 내 인생이 꽃필 수 있다고 생각해. 충분히.” 할머니 노릇에 몸과 마음이 지쳐, 찜질방 다니고 화투나 치는 또래 친구들을 보면 “세월이 아깝다”는 생각에 안타깝기만 하다고. “내 나이 주부들에게도 용기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기쁘지. 사람은 저마다 한가지씩 잘하는 게 있다고 믿거든. 희망을 가져야지.” ‘주부 9단’이자, 배우로서도 ‘유단자’가 된 이정표씨의 전진은 계속될 것이다. 아줌마의 파워가 다하는 그날까지. 글 박은영 cinepark@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