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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회 부산 국제영화제/작가영화(2)
2002-11-08

거장의 뒤를 밟는 성지순례

과거가 없는 남자 The Man without a Past

▶ 월드 시네마/ 핀란드/ 아키 카우리스마키/ 2002년/ 97분

▶ 11월 16일 오후 5시 부산1, 11월 20일 오후2시 부산 1

실직당한 노동자들에게 바치는, 무뚝뚝한 그러나 진심어린 응원.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따뜻해졌다. 그는 예의 그 뚱한 얼굴로 “현실이 너무 비극적이기 때문에 영화는 해피엔딩이길 바랐다”고 말한다. 그건 사실인 것 같다. 불경기의 한파 속에서 직장을 잃고 자꾸만 더 낮은 계급으로 추락하는 이들에겐 위무가 필요하다. 카우리스마키는 헬싱키 실직 노동자들의 가슴에 낀 서릿발을 녹여낼 따뜻하고 아름다운 영화를 구상하기로 했고, 그래서 나온 작품이 <과거가 없는 남자>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헬싱키에 온 남자는 밤길에 불량배를 만나 돈을 빼앗기고 죽도록 얻어 맞는다. 의사들마저 죽은 줄 알았던 그 남자는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이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을 구해준 홈리스 무리에 섞여 살게 된 남자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찬송가를 부르고 음식을 나눠주는 구세군 여성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우연히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게 된 남자는 자신에게 아내와 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부부 생활이 이미 파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반색하며, 구세군 아가씨에게로 돌아온다.

보이지 않던 인간이 보인다는 의미에서 <투명인간>의 리메이크격이라거나, 이 모든 이야기가 주인공이 죽은 뒤의 꿈이라는 해석들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과거가 없는 남자>가 간결한 형식에 날카로운 유머를 자랑하는 작품이라는 점이다.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기 전에는 절대 그 속마음을 헤아리기 힘든 ‘포커 페이스’의 인물들, 여기에 최소한의 동선과 최소한의 장식,천연덕스러운 유머와 풍자가 조응하고 있는 <과거가 없는 남자>는 영락없는 카우리스마키표 영화다.그러나 카우리스마키의 이력이나 그의 영화를 잘 알지 못하는 관객도 재밌게 즐길 수 있을 만큼 오락적인 요소를 갖춘 영화이기도 하다.

불확실성의 원리 The Uncertainty Principle

▶ 월드 시네마/ 프랑스·포르투갈/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 2002년/ 133분

▶ 11월 17일 오후 8시 대영1, 11월22일 오후2시 대영3

숨은 신의 주사위놀이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지금 올리베이라만큼이나 그의 신작을 애타게 기다리게끔 만드는 감독은 많지 않다. <불확실성의 원리>는 <프란시스카> <아브라함 계곡> 그리고 <편지>로 이어지는 올리베이라 영화의 계보에 놓일 만한 작품이다. 여기서 제목을 통해 불려져나온 하이젠베르크의 유명한 원리는, 삶에 개입하는 우연과 운명에 대한 통찰을 위해 끌어온 메타포이다. 안토니오와 호세, 카밀라와 바네사라는 네명의 남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은 종종 묘사되기보다는 발화되며 신과 신 사이에 생략된 시간은 어느새 인물들이 놓인 상황을 바꾸고 재설정한 것으로 드러나곤 한다. <불확실성의 원리>는 새로운 세기에도 여전히 흐트러짐 없이 자신의 세계를 완성해나가고 있는 94살의 노대가가 보여주는 신기한 영화이다.

돌스 Dolls

▶ 폐막작/ 일본/ 기타노 다케시/ 2002년/ 113분

▶ 11월23일 오후 6시30분 부산시민회관, 오후10시30분 부산시민회관

탐미적이고 공허한 사의 찬미 이처럼 탐미적이고 동시에 공허한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돌스>는 기타노가 그의 몇몇 작품들을 통해 보여주었던 ‘사의 찬미’가 거의 매너리즘에 다다른 영화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노, 가부키와 더불어 일본의 3대 전통극 가운데 하나인 분라쿠를 영화에 도입하려 한 <돌스>는 인물들을 보듬은 풍경이 점점 원색적이고 화려한 것이 될수록 그것 말고는 거의 관심을 끄는 것이 없어지는 영화이다. 여기엔 각기 애틋한 사랑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남녀 인물들이 등장하는 세개의 에피소드가 얽혀 있으며, <하나비>에서처럼 재치있게 시간을 분절하고 조립하는 스타일 또한 보여진다. 부분적으로는, 오 헨리의 원작을 가지고 이와이 슌지가 연출한 것이라고 해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을 영화.

스위트 식스틴 Sweet Sixteen

▶ 오픈 시네마/ 영국/ 켄 로치/ 2002년/ 106분

▶ 11월 18일 오후 8시 부산 시민회관, 11월21일 오후 5시 부산시민회관

글래스고 하층민 소년에게도 희망은 있는가. “열여섯 생일을 축하한다.” 이른 아침 바닷가에서 생일축하 전화를 받은 리암의 얼굴이 어둡다. 그의 꿈은 이미 산산조각 났고, 그는 쫓기는 몸이다. 이제 겨우 열여섯. 소년 리암에겐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일찌감치 학교를 때려치운 말썽장이지만 근본은 착하고 순수한 리암은 미혼모인 누이, 그리고 감옥에 있는 엄마와 함께 머물 아늑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싶어한다. 마약 거래든 뭐든, 할 수 있고 돈이 되는 일은 뭐든 하면서 어렵사리 돈을 모은다. 그러나 감옥에서 나온 엄마는 다음날 젊은 애인의 집으로 떠나버린다. 가족과 함께 사는 꿈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이 절망의 끝에서, 그래도 미래가, 희망이 남아 있음을 믿어야 하는가. 켄 로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한치의 흔들림 없이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단 한 사람. 켄 로치가 위대한 시네아스트인 건 그래서이다.

<스위트 식스틴>은 영어권 영화인데도 글래스고 지역의 사투리 억양 때문에 영어 자막을 넣었던 칸영화제 상영 때와 달리, 얼마 전 영국극장 개봉 당시엔 초반 몇 분 동안만 자막을 넣었다고 한다. 이유인 즉슨, “리암처럼 당신(관객)도 이제부터 혼자 견뎌야 한다”는 것. 욕설이 난무한다는 이유로 등급을 불리하게 받은 문제 등이 겹쳐, <스위트 식스틴>은 관객몰이에 실패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런 흥행 실패가 켄 로치의 향방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 같진 않다. 대중 매체에서 사라져간 좌파의 자리를 지난 40년간 지켜온 켄 로치가 아닌가. 그는 또다시 영국 사회의 하층민들과 마주할 것이고, 희망을 이야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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