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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아이덴티티>의 주무대 파리에 대한 아저씨의 단상
2002-11-14

본이 파리를 헤맬 때 내 가슴은 뛰었어라

지하철 삼성역에서 메가박스까지 가는 땅속길은 지금도 내게 미로다. 코엑스몰이라는 언더그라운드 상업도시는 이방인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할 만큼 거만하다. 간신히 찾은 메가박스는 여느 주말처럼 붐볐다. 아내와 나는 매표구에 다다르기 위해 40분 넘게 서 있었다. 매표구 앞에서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그 이름도 찬란한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와 처음 듣는 이름인 더그 라이먼의 <본 아이덴티티> 사이에서. 느려터지게 줄어드는 줄 속에서 우리는 당초 <본 아이덴티티>를 골랐었다. 그런데 매표소 앞에 이르자 채플린이 그 명성의 힘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위대한 독재자>를 포함해 채플린 영화를 이미 대부분 본 터였지만, 그건 오로지 브라운관을 통해서였다. 그러니 매표소 앞의 망설임은 작은 스크린으로 이미 본 명품을 큰 스크린으로 다시 보느냐, 아니면 이왕 돈 들여 시간 들여 보는 건데 미국인들을 사로잡았다는 ‘쌤삥’ 영화를 보느냐 사이의 망설임이었다.

매표원이 건네는 재촉의 눈길 속에서 망설임이 길 수는 없었다. 아내가 결단을 내렸고, 내가 맞장구쳤다. 우리는 다시 2시간 반을 기다려 <본 아이덴티티>를 봤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았다. CIA를 윤리적으로 비난하는 체하면서도 실상 그 전능함을 선전하는 꼼수,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자기 과거의 단서를 찾을 때마다 어김없이 닥쳐오는 위험, 어울려 보이지 않는 남녀의 우연한 만남을 필연적 사랑으로 바꾸는 조홧속 등 그 상투적 코드들이 주는 기시감(旣視感)에도 불구하고 <본 아이덴티티>는 잘 만들어진 오락영화였다.

처음 이 영화 제목을 들었을 때부터 나는 줄곧 그것을 born identity, 곧 ‘타고난 정체성’으로 해석했다. 그것이 본(Bourn)이라는 사나이의 아이덴티티를 가리킨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영화를 보면서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말놀이일 터이다. 그러니 <본 아이덴티티>(Bourn identity)는 본이라는 사내의 ‘타고난 정체성’(born identity)에 관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본(本)아이덴티티로도 읽힌다. 아무튼 영화 속의 제이슨 본은 기억을 잃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늘 본능적으로 사위를 경계하고 민첩하게 위기를 벗어난다. 타고난 CIA 최정예요원답게. 그의 이름이 가장 유명한 살인면허 소지자 제임스 본드와 닮은 것도 우연 이상일 터이다. 기억 상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언젠가부터 술자리에서 ‘필름이 끊기는’ 일이 잦다. 이게 알코올 중독의 초기 증세라는 말을 들은 듯도 하다. 술을 마시다가 필름이 끊긴 이튿날엔 불안과 자괴로 우울하다. 서로 다른 이름의 자기 여권들 앞에서 본이 난감해하듯, 술 먹은 이튿날에는 주머니 속에서 나온, 모르는 사람들의 명함과 메모 때문에 난감하다.

<본 아이덴티티>의 주무대는 파리다. 30대에 바람이 들어 다섯해 동안 그 도시에 산 적이 있다. 그 바람의 기원은 어린 시절 텔레비전의 케미슈즈 광고에서 인상 깊게 보고들은 에펠탑과 <파리의 하늘 밑>이라는 노래인 것 같다. 자라면서 나는 그 도시에 프랑스 혁명과 파리코뮌과 레지스탕스의 이미지를, 앞에 신(新)자나 반(反)자가 붙은 역사학 철학 소설 연극의 이미지를, 그리고 구조주의니 해체주의 하는 기괴한 주의들의 이미지를 보탰다. 실상 이것은 파리에 대한 상투적 이미지다. 그리고 이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은 프랑스인들만이 아니라 미국인들이기도 하다. 몇 개월 전 케이블로 본 한 미국 방송은 파리를 “2000년 동안 술과 연애에만 몰두해온 도시, 가끔 제 정신이 나면 예술과 혁명에 몰두했던 도시”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술과 연애의 도시 파리’라는 상투에 가장 충실한 문학 작품 가운데 하나가 헤밍웨이의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일 터이다. 술과 연애로 젊음을 탕진하는 소설 속의 미국인들, 그 ‘길 잃은 세대’는 10대의 내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 소설의 영향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게 그럴듯하게 생각된 영미인들은 대체로 파리를 거쳐간 사람들이었다. 에즈라 파운드, 헨리 밀러,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코트 피츠제럴드,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제임스 조이스, 맨 레이 같은 사람들 말이다. 그 ‘파리의 미국인들’이 진짜 파리 사람들과 어울리며 빚어냈다는 1910~20년대 파리 풍경은 내 상상력 속에서 헛바람으로 한없이 부풀었다.

그러고보면 <본 아이덴티티>도 파리의 미국인들 얘기다. 술과 연애 얘기라기보다 음모와 배신과 살인, 총싸움, 몸싸움 얘기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모든 세대가 그 당사자들에게는 길 잃은 세대라면, 영화 속의 제이슨 본도 그럴 것이다. 게다가 그는 정말로 길을 잃지 않았는가. 그 길 잃은 본이 파리의 길을 헤맬 때, 그 도시의 낯익은 거리들이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이방인들의 파리 애호는 대체로 허영심과 뗄 수 없다. 내 파리 애호도 그럴 터이다. 그러나 나는 이 소박한 사치를 거두고 싶지 않다. 길 잃고 망가진 40대 아저씨가 누릴 수 있는 마음의 사치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고종석/ 자유기고가 aromach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