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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명의 여인들>의 감독 프랑수아 오종의 영화세계
2002-11-16

담대한 악동, 혹은 미완의 거장

 

홍성남/영화 평론가

일찍부터 오종은 별난 별명을 부여받았다. 이를테면 ‘우상파괴주의적인 프랑스의 신동 영화감독’이 젊은 영화감독 오종을 가리키는 닉네임이었다. 그의 영화들은 대개 사회의 규범을 간단히 무시하고 게다가 종종 폭력(적 상황)을 수반하기도 하는 위반의 섹슈얼리티를 자주 분출해낸다.

프랑수아 오종은 52분짜리 중편 <바다를 보라>(1996)나 첫 장편인 <시트콤>(1998)으로 일찌감치 평자들 사이에서 주목을 끌어냈었다. 그러나 그의 이 초창기 영화들은, 한편으로 다른 부류의 평론가들에게는 그 지나친 경박함이나 다소 공허해 보이는 도발로 인해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이 비판자들에게 오종이란 영화감독은 공허한 도발만을 일삼으며 안타깝게도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쓸 줄 모르고 소진시키고 마는 괴짜 영화감독 정도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오종의 세 번째 장편 <워터 드랍스 온 버닝 락>(2000)을 마주한 후로는 태도를 슬슬 바꿀 태세를 갖추었고 그 다음 작품인 <사랑의 추억>(2000)을 보고는 오종에 대한 그간의 입장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그렇게 오종은 그저 ‘동시대 프랑스 영화계의 악동’ 정도에서 ‘프랑스 영화의 확실한 자산’으로 상승의 자리 이동을 하게 된다. 오종에 대한 이런 비평적 시선의 변천은, 그가 완전한 자기 세계를 갖추었다기 보다는 아직 예술적 ‘성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미완의 작가, 그러니까 지금보다는 오히려 내일이 더 기대되는 미래의 시네아스트임을 알려준다.

1967년 파리에서 태어난 오종은 영상매체와 자연스레 가까워질 수 있는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일찍부터 그는 아버지가 비디오로 찍은 다양한 영상들을 봐 왔고 10대 후반부터는 수퍼 8mm로 직접 많은 단편영화를 찍어왔다. 오종은 파리 1대학에서 영화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90년에는 페미스(FEMIS)에 들어가 영화연출을 전공하게 된다. 그 뒤로도 그는 꾸준히 단편영화들을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다수가 세계 유수의 단편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오종의 단편으로 특히 유명한 <썸머 드레스>(1995) 같은 작품은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내일의 표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중편 <바다를 보라>를 만든 다음에 오종은 <시트콤>이란 작품을 가지고 장편영화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된다.

일찍부터 오종은 정규 ‘시스템’ 안에서 수학했던 모나지 않은 경력이나 또는 스탠더드하게 잘 생긴 반듯한 용모로는 유추하기가 쉽지 않을 듯한 별난 별명을 부여받았다. 이를테면 ‘우상파괴주의적인 프랑스의 신동 영화감독’이 젊은 영화감독 오종을 가리키는 닉네임이었다. 금기를 무시하는 듯한 대범한 태도로 성적인 게임을 벌이는 10대 소년 소녀들의 이야기(<진실 혹은 대담>, 1994)나 어느 여름날 해변에서 여자와 '첫 경험'을 갖게 되는 게이 청년의 이야기(<썸머 드레스>)를 그린 초창기의 단편영화들에서부터 이미 오종은 그에게 붙은 그런 별명이 적절하다는 것을 보여줬었다. 요컨대 오종의 영화들은 대개 사회의 규범을 간단히 무시하고 게다가 종종 폭력(적 상황)을 수반하기도 하는 위반의 섹슈얼리티를 자주 분출해내고 또 기발하고 도발적인 상상력으로 그것을 흥미롭게 그려내는 것들이라고 보면 된다.

도발적 상상력과 무정부주의적 감성

오종의 첫 번째 장편 <시트콤>은 그의 우상파괴적인 태도, 혹은 무정부주의적인 감성이란 게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다. 부르주아 가정의 가장인 장은 어느 날 집안에 애완용 쥐 한 마리를 가지고 오는데 바로 그 때부터 집안 사람들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아들인 니콜라가 벌떡 일어나 자기는 게이라고 갑작스런 커밍 아웃을 하는가 하면 딸인 소피는 한밤중에 2층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기도한다. 이후로 이 가정은 그룹섹스, 근친상간, 사도마조히즘적인 별난 소동 등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난장판으로 변해버린다. 이 요란스런 소동을 통해 오종은 부르주아적 심성, 좀체 정체(停滯)를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무덤덤한 그 심성을 마구 골려주며 공격해댄다. 영화 속의 가장 장은 그런 미적지근한 부르주아적 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집안에서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괴이한 사건들에 대해 엘렌느가 지나치게 민감하게 대응한다면 그녀의 남편인 장은 심적인 동요라곤 전혀 보여주질 않는다. 결국 집안 사람들은 합심해 자신들의 주적(主敵), 즉 커다란 쥐로 변해버린 아버지 장을 죽여버린다.

<시트콤>은 아무래도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걸작 <테오레마>(1968)부터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그 정체가 신이지 않은가 싶은 어떤 미지의 청년이 부르주아 가정을 방문하면서 그 가족의 질서가 와해되어 간다는 이야기를 그린 파졸리니의 영화에 오종 특유의 공격적 상상력을 덧붙여 개작한 것이 <시트콤>처럼 보이는 것이다. 물론 오종의 영화 세계는 파졸리니말고도 다른 시네아스트들의 세계와도 한 번 짝지어볼 만한 것이다. 이를테면, 오종의 영화는, 종종 악취미를 과시한다는 점에서는 존 워터스의 영화를, 다분히 도착적이고 복잡한 성적 관계를 가지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직조해나간다는 점에서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를, 그리고 상당히 회의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를 닮은 데가 있다. 최근의 행보를 살펴보면 오종은 자신의 행동 반경을 점차 넓혀 가는 영화감독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예컨대 그의 최근작 (2001)을 통해 그는 조지 쿠커와 더글라스 서커의 자취를 자신의 필모그래피 안에 추가해 넣은 것이다. 그런 오종이 스스로 가장 경애한다고 하는 시네아스트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이다. 그는 “나는 항상 파스빈더의 영화들뿐만 아니라 영화감독으로서 그의 삶 또한 숭배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오종이 파스빈더가 열 아홉 살 때 쓴 희곡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 <워터 드랍스 온 버닝 락>을 만든 것은 파스빈더에 대한 절절한 경애의 표시였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오종은 파스빈더를 충실히 따라서 애정이란 곧 억압을 위한 가장 교활한 수단은 아닌가, 하고 묻는다. 비록 파스빈더처럼 그런 견해를 거쳐서 정치적·역사적 컨텍스트까지 들여다보려는 노력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지만, 어쨌든 오종은 파스빈더와 유사한 견해를 인간 존재의 비극과 부조리, 그 잔인함에 가 닿으려 한다.

젊은 ‘작가’의 다음 행보는?

스토리의 원천에서나 주제에서, 게다가 시각적 설계에 있어서까지 파스빈더를 차용한 영화 <워터 드랍스 온 버닝 락>도 상당히 흥미로운 영화인 건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오종이 만든 영화들 가운데 최고작을 꼽으라면 그 자리는 <사랑의 추억>에게 돌아갈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오종의 최고작은 오종적인 영화라곤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전까지 오종의 영화들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었던 어떤 자유분방함 혹은 무정부주의적인 감수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도발적 표현 같은 것들이 말끔하게 표백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구체적인 이름을 거론하자면 클로드 소테 식의 영화에 더 가까이 있는 듯한, 다시 말해 오종이 무정부주의적 세계에서 빠져나와 프랑스 멜로드라마의 전통에 들어가 버린 듯한 인상을 주는 이 영화는 상실을 안고 사는 한 중년 여인의 내면을 느리게 그러면서 꼼꼼하게 파고든다. 주인공 마리는 여름 휴가 때 어디론가 사라져 이후로 다시 나타나지 않는 남편 때문에 상실을 껴안고 사는 인물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이 영화가 대충 어떻게 진행될 영화인지 선입견을 갖기 쉽다. 아마 이것은 주인공 마리가 결국은 상실감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가 될 것이다, 라는. 그러나 <사랑의 추억>은 이런 우리의 선입견을 슬기롭게 빠져나간다.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마리의 내적 세계에 동행하도록 권유하면서 그녀가 회복되기는커녕 오히려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따라가게 만든다.

심리적 뉘앙스가 풍부한 <사랑의 추억>은 오종의 전작들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이라도 감정을 움직이게 만들 만한 영화다. 예컨대, '경박하기 짝이 없는 <바다를 보라>에 실망해 오종의 다른 영화들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던 미국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조나단 로젠봄은 <사랑의 추억>을 보고는 다소 흥분한 어조로 이렇게 썼다. “앞으로는 오종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나는 그의 다음 영화를 회피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사랑의 추억> 이후에 만들어진 오종의 영화는 과연 그를 젊은 ‘영화작가’로 추대해줄 만한 것일까, 라는 기대 혹은 호기심을 품을 만하다. 가시적인 성과만 갖고 보자면 분명히 오종은 최근작 로 한 발짝 앞으로 성큼 내딛은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프랑스에서 흥행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거머쥐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전작 <사랑의 추억>에 맞먹을 비평적 찬사를 받을 영화인지는 사실 의문스럽다(실제로도 이것은 일치된 찬사를 이끌어낸 <사랑의 추억>과 달리 평자들 사이에서 호오가 엇갈린 영화였다). 이 신작에서 오종은 다니엘 다리외라는 프랑스 영화의 전설적 스타로부터 그 다음 세대의 스타들인 카트린느 드뇌브, 파니 아르당 등을 거쳐 신예 스타인 비르지니 르도양에 이르는 유명 여배우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는 그들에게 멜로드라마와 미스테리 스토리, 그리고 코미디와 뮤지컬이 교묘하게 한데 뒤섞인 어느 실내 배경을 제공해준다. 그렇게 해서 오종은 이 여성 캐릭터들 사이의 복잡미묘한 관계를 들여다보려 하지만 그 시선은 깊이가 다소 결여되어 있고 여러 장르가 혼융되어 있는 이야기는 즐거움만을 주기엔 자주 삐걱거린다. 은 오종이 행동 반경을 넓혀놓기만 했을 뿐 여전히 그가 미완임을 보여준 영화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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