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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한 미국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
2002-11-20

˝한국영화,관객과 영화제 둘 다 잡았다˝

악마의 사전에서 ‘고전’의 뜻을 찾아보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통독하지 않은 책”이라고 풀이돼 있을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보드웰 그리고 크리스틴 톰슨이라는 이름이 귀에 설지 않다면 당신의 책장을 한번 살펴보자. <영화 예술>(Film Art)이나 <세계영화사>(Film History)라는 제목의 묵직한 책이, 한때 결의에 부풀어 출석했던 학교나 문화센터의 영화학 개론 수업의 추억을 뜨끔하게 일깨워줄 것이다. 하지만 일부 부지런하고 열심인 서울의 영화학도들은 지난 11월12일 오후 데이비드 보드웰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미국 위스콘신대학(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에 재직 중인 보드웰 교수는 한국 영화학회의 초청으로 동반자 크리스틴 톰슨 교수와 나란히 내한해 11월12일 동국대에서 최근 영화학의 동향을 간추리고 오랫동안 그가 집중해온 ‘역사적 영화 시학’(Historical Poetics of cinema)을 유효한 방법론으로 제안하는 강연을 가졌다. 무엇보다 영화학 교과서의 블록버스터(?) 작가로 유명한 데이비드 보드웰이지만, 그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려 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역사적 시학의 아치를 통과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비롯된 시학은 대상을 재현하는 예술 작품이 빚어지는 원리 체계를 탐구하는 방법론이다.

보드웰의 역사적 시학은, 정신분석학 구조주의 네오마르크시즘 등 하나의 세계관을 아우르는 거대 이론(Grand Theory)이나 개별 영화 해석의 집적이 결코 영화의 본성과 역사에 대한 쓸모있는 지식을 제공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거친 예를 들자면, “초기 영화는 모더니티가 태동하는 도시 환경의 반영이다”라거나 “영화의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관음하는 남성적 시선으로 재단된다”라는 대명제를 받아들이기보다 그것들이 한 역사적 지점에서 실제로 어떻게 영화의 특정한 스타일과 관행을 형성했는지 알기 위해 중간 레벨의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야 한다는 입장. 증거와 개념의 적합 여부에 엄밀하다는 점에서 역사적 시학은, 문학과 철학의 향이 진한 유럽 태생의 거대 이론들과 상반되는 미국 실증주의의 풍모를 띤다. 뿐만 아니라 개별 영화의 해석을 더 큰 역사 연구의 맥락 안에 넣고 주어진 이슈의 성격에 따라서 걸맞은 거대 이론의 방법론을 끌어들이는 역사적 시학은 영화이론, 영화사, 영화비평의 오랜 경계를 지우려는 야심도 감추고 있는 셈이다. 1980년대부터 데이비드 보드웰은 크리스틴 톰슨, 재닛 스타이거, 노엘 캐롤 등과 함께 혹은 단독으로 펴낸 <픽션 영화의 내레이션> <고전 할리우드 시네마> <포스트 이론> 등의 저서와 몇몇 감독론을 통해 영화 스타일과 생산양식이 서로를 결정한 양상을 분석하는 사적 시학의 틀을 제시하는 동시에 실천의 본보기를 보여왔다.

서울 세미나를 마치고 부산영화제 첫 참석을 이틀 앞둔 보드웰을 인터뷰하러 가는 발길은 조금 무거웠다. 단지 거물학자에 대한 부담이 아니라, 그가 공허한 질문에 냉담한 동시에 모두 당연히 여겨온 것들을 누구보다 집요하게 질문하는 문답의 대가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연석과 코코아를 주문한 다음, 기자가 건넨 부산영화제 카탈로그에 반색한 보드웰은, 뭐니뭐니해도 영화를 열애하고 공부를 좋아하고 영화와 공부에 대해 수다떨기를 즐기는 친절한 교수님이었다. 학생들은 수업을 빼먹고 영화제를 보러 가는데 교수는 수업을 빼먹고 영화제에 갈 수 없는 ‘불의’를 개탄하는.

젊은 날의 당신을 영화학 연구로 이끈 힘은.

→ 15, 16살 무렵부터 흥미를 가졌지만 특별히 영화를 많이 보진 않았다. 고교 시절 에이젠슈테인, 벨라 발라즈, 푸도프킨을 읽으며 관심을 키웠고 대학에 가서 영화를 많이 볼 수 있게 되자 이론과 영화감상이 서로를 북돋우는 형국이 됐다. 고등학교에서 학부 전공인 영문학을 1년 가르친 다음 아이오와로 가 영화학을 공부했다. 그러는 동안 미국의 대학에 영화학 코스가 보급돼 1973년 내가 공부를 마칠 무렵에는 교수의 수요도 늘어났다. 역사의 행복한 우연이다. (웃음)

영화학자로서 관심사의 궤적을 요약한다면.

→ 처음 나의 양대 주제는 미국영화와 프랑스영화였다. 미국영화는 당연히 제일 친숙했고, 나의 대학 시절에는 누벨바그의 파도를 높였던 프랑스영화가 인기였으니까. 내 학위논문 주제는 루이 델뤽, 제르멘 뒬락 등의 프랑스 인상주의영화였다. 할리우드 연구를 거쳐 아시아영화와 역사적 방법론이 관심의 초점이 됐다. 주요 관심사가 구체화된 건 1970년대고 그 이후로는 같은 주제를 파고들고 있다. 난 통 발전하지 않는 모양이다. 계속 도돌이표를 그리니 말이다. 1970년대에 사랑한 오즈에 대한 책을 1988년에 썼고 10대 시절 좋아한 에이젠슈테인에 관한 책은 1993년에 썼다. 어떤 주제들은 결코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한 사람과의 긴 세월에 걸친 로맨스처럼. 근년 들어 내게 가장 중요한 발견은 국제영화제였다. 1990년대 초부터 이탈리아, 홍콩, 아르헨티나 등지의 영화제에 참석하면서 미국에서 볼 기회가 없는 현대 영화들을 보는 일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동반자이자 학문 동지인 크리스틴 톰슨과는 어떤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나.

→ 우리의 관심사는 교집합이 있다. 각자 본 영화 중 추천하기도 하고 책을 함께 쓸 때는 아카이브에서 같이 영화를 보고 각자 연구 부분을 맡아 쓴다. 예컨대 <세계영화사>에서 일본 부분을 제외한 무성영화의 장은 크리스틴이 썼다. 그녀는 나보다 역사적 지식에 해박하고 한번 보면 잊지 않는 기억력을 갖고 있는 반면 나는 연대에는 젬병이다. 현재 크리스틴은 초기영화, 영화 <반지의 제왕>(톨킨의 오랜 팬으로서), 그리고 영화와 무관한 이집트학을 연구 중이다.

<영화예술>은 몇개 국어로 번역됐나.

→ 프랑스어, 한국어, 중국어, 스페인어, 그리고 그리스어판이 준비 중이다.

당신과 톰슨은 가장 유명한 영화학 교과서의 저자다. 또 당신 문체의 최우선 목적은 독자에게 내용을 명백히 전달하고 이해시키는 데 있어 보인다. 가르치는 일에 큰 의미를 두나.

→ 교사의 일은 내게 매우 소중하며 저술은 가르치는 일의 연장이다. 나의 흥미를 학생들에게 전이시키고 싶다. 학생들에게 잘 설명할 수 있다면 명백하게 쓸 수도 있다. <영화예술>에 착수할 무렵 우리는 충분히 세련되지 못한 개론서들에 불만이 있었다. 우리는 더 깊고 어려운 내용을 다루면서도 더 이해하기 쉬운 교과서를 쓰려고 했다. 또, 미국에서 나온 대부분의 영화사 교과서는 대단히 미국 중심적이다. 영어에는 R. O. W라고 나머지 세계(rest of the world)를 줄인 약어조차 있다. 모든 것을 미국과 그 외의 것으로 단순화하는 것이다. 강의 내내 미국을 설명한 다음 “음, 그리고 독일 표현주의라고 할리우드와 다른 사조가 있었는데 1925년에 끝났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이라는 것도 한때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덧붙이는 식이다. 스무편 남짓한 클래식을 논하는 영화사도 있다. 우리는 영화사의 더 큰 그림을 보여주고 싶었다. 얼마 전 개정판을 낸 <세계영화사>에는 한국영화 섹션도 포함돼 있으며, 각국 영화가 뉴웨이브를 흡수하고 다른 나라 영화와 융합하는- 일본 자본이 대만, 한국 감독과 홍콩 스타를 기용해 영화를 만드는 예에서 보듯- 양상을 그린 ‘세계화’ 챕터도 보탰다.

그럼 동아시아영화에서 일종의 그룹스타일을 논할 수 있다고 보나.

→ 적어도 국제영화제에 소개되는 예술영화 영역에서는 그룹 스타일에 근접하는 양식, 일종의 아시아적 미니멀리즘을 거론할 수 있다. 허우샤오시엔, 홍상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서는 정적인 롱 테이크가 한신의 기초로 공히 쓰인다. 물론 그 장면에 이르기까지의 원인은 각기 다르다. 예컨대 기타노 다케시의 초기작과 수오 마사유키의 <으랏차차 스모부> 같은 영화의 대화신을 보면 두 인물의 정면 근접 숏을 번갈아 보여주는 비슷한 스타일이 보이지만, 수오는 오즈 야스지로를 선망해 그를 직접 본뜬 경우고 기타노의 스타일은 대중문화와 만화의 영향, 어린아이 그림 같은 기타노 자신의 그림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흥미로운 1차적 유사성을 논하는 데에서 출발해 역사적 맥락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영화학도 사이에서는 당신이 완수한 연구의 치밀함도 화제지만, 프린트의 프레임을 수평적으로 펼쳐 분석할 수 있는 기계 같은 리서치 도구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영화의 역사적 시학이라는 방법론을 어떻게 실천하는지.

→ 말한 기계는 플랫 베드 편집기다. 수직으로 필름을 보는 구식 무비올라와 달리 수평적으로 프레임을 관찰할 수 있는 장치로 독일에서 60년대에 발명됐다. 한달 전에는 커다란 스코프 이미지를 볼 수 있는 새 기계가 연구실에 들어왔다. 필름이나 사료나 모두 가장 중요한 연구의 장은 아카이브다.

역사적 시학은 영화 언어의 규범을 수용하고 변용하는 선택 과정을 중요시한다. 실제로 영화인들을 자주 인터뷰하나.

→ 영화인들에게 직접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점은 죽은 감독을 주로 연구했던 과거에 누릴 수 없던 기쁨이다. 기타노 다케시, 허우샤오시엔, 올리비에 아세야즈, 홍상수 등을 만났다. <고전 할리우드 시네마>를 쓸 때 만난 사운드, 카메라, 현상, 편집 스탭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질문한 적이 없었다”면서 인터뷰에 질린 감독들과는 다른 신선하고 자발적이고 따라서 더욱 정확한 증언들을 들려주었다. 예컨대 그들이 확인해준 컨티뉴어티 스탭(스크립터)의 도입 시기는 할리우드가 노동을 전문, 세분화한 역사를 쓰는 데에 도움을 줬다.

일선 평론가들은 역사적 시학의 결실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

→ 영미권에서 아카데미와 영화평은 완전히 분리돼 있고 양쪽의 종사자는 서로에게 무관심하거나 무시한다. 추상적인 길로 내달아 실제 영화생산과 유리된 1970년대 영화학은 학자와 평론가, 영화인 사이에 큰 간극을 냈다. BFI 소장이 된 앨런 파커 감독이 BFI가 기호학 운운하는 쓸모없는 저술을 출판되기 원치 않는다고 말해 스캔들을 낸 사건도 같은 맥락이다. 사실 그때는 이미 기호학자를 자처하는 영화학자도 별로 없었으니 그것도 시대착오였지만. 역사적 시학은 실용 비평과 영화학 사이의 자연스런 가교다. 어떤 신작이 과거의 한국영화 전통, 그리고 일본이나 홍콩, 할리우드의 규범과 어떤 영향관계에 있는가를 묻는 질문은 한국 평론가와 역사적 시학의 연구자에게 공통의 관심사다. 어제 만난 이현승 감독은 “영화감독으로서 당신의 이론은 내게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이론은 종종 감독들이 실제로 직면하는 문제에 눈을 감는다. 기술적 이슈들이 영화가 어떻게 보이고 들리느냐에 결정적임에도 불구하고. 1970, 1980년대 <스크린>의 이론가들은 테크놀로지에 대해 “테크놀로지는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적이다” 정도의 추상적 차원에서만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스테디캠을 이해하지 않고는 현대영화를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감독론으로는 칼 드레이어, 오즈 야스지로, 에이젠슈테인 세 사람에 대한 책을 썼다. 어떤 점에서 그들은 당신을 매혹했나 홍상수 감독에 대한 관심은 어떤 맥락인가.

→ 나는 영화언어의 규범과 컨벤션을 실험하는 감독에게 관심이 있다. 에이젠슈테인과 드레이어는 그런 점에서 깔끔한 케이스다. 그러나 오즈는 좀더 복잡하다. 모두 그를 매우 전통적인 감독이라고 믿었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의 영화는 완전히 혁신적이고 창의적이다. 오즈는 내게 거의 완벽한 감독이다. 스튜디오에 고용돼 스타와 장르를 이용해 남녀노소가 이해하는 영화를 만들면서도 다른 차원에서는 놀랄 만큼 복잡미묘하고 세련된 작품을 만들었다. 한국영화를 30편밖에 못 봤지만 홍상수는 내가 접한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실험적이었다. <강원도의 힘>은 남녀의 두 관점을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했는데 <오! 수정>은 두개의 관점으로 동일한 현상을 아예 다르게 그린다. 같은 사건은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유럽 모더니즘영화의 크로스오버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전에 본 적 없이 혁신적인 형식이었다.

당신이 보는 한국영화의 힘은

→ 홍콩은 자국과 중국 이주민 공동체, 필리핀 등지에서 강력한 지역 대중영화를 만들었지만 왕가위를 빼면 예술영화가 미약하다. 반면 대만영화는 1980년대 이후 영화제를 겨냥한 영화만 남고 대중영화는 죽었다. 그러나 한국영화는 자국은 물론 일본, 홍콩 시장에서도 관객을 늘리는 동시에 영화제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언제나 자기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관객 베이스가 없는 내셔널 시네마란 어딘가 작위적이라고 느낀다.

1990년 이후 디지털영화에 대해, DVD에 대해 요란한 설왕설래가 있었다. 영화사의 새로운 시대구분이 필요하다고 느낀 적 있는지.

→ 시대구분은 항상 지나고서야 분명히 판단할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분명 1996년, 1997년 언저리에 새로운 가능성과 관습이 들어서기 시작한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지 않았나 싶은 감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늘 자신이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고 싶어하게 마련이기에 시대구분의 유혹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필요가 있다. 1850년쯤부터 세상에는 매년, 아니 달마다 “지금부터는 모든 게 다른 시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매체의 민주화를 말할 수는 있겠지만, 검색 엔진을 써보면 상위 20개쯤이 닷컴자 돌림의 거대 사이트다. 대형 사이트끼리 대화할 따름이다. 디지털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그걸 갖고 무엇을 할지 아직 알 수 없어서다. 디지털 기술로 저예산영화도 매끈한 만듦새를 가질 수 있게 된 점은 상당히 중요하다.

출판 예정인 다음 책은.

→ 루이 푀야드, 미조구치 겐지, 테오 앙겔로풀로스, 허우샤오시엔이 롱 테이크를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대한 스타일 분석서다. 내러티브에 대한 또 한권의 책도 나온다. <픽션 영화의 내레이션>의 속편이랄 수도 있지만 최신 영화 사례와 더 많은 아이디어를 담는다. 홍상수 영화도 예로 쓰이지만 미국에도 <펄프 픽션> 이후 시점 유희, 액션의 반복을 활용하는 트렌드가 있다. 실험적 내러티브의 귀환이 주제가 될 터다. 이란영화도 거론된다. 12편 정도의 영화로 범위를 좁힌 홍콩영화에 관한 책도 준비하고 있다.

거대 이론에 반대하는 역사적 시학의 옹호자로서 영화학에서 포괄적 통찰을 성취하는 유일한 방법은 중간 레벨 연구의 총합뿐이라고 보는가 그렇다면 학제간 협력은 필수적인가.

→ 역사적 시학의 기본 입장은 비교연구다. 어떤 것도 진공상태에서 보지 않으려는. 연구란 영원히 완료되지 않는 진행형이다. 흔히 오해하는데 책도 연구의 일시적 결정체일 뿐이다. <포스트-이론>에서 노엘 캐롤과 내가 썼듯 중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이론화다. 질문하고 대화를 통해 질문을 더 가다듬는 과정이다. 학제간 협력은 절대적이다. 나 역시 음악이론, 미술사에서 영감을 얻었고 연극보다 회화가 영화와 유사한 문제를 품은 매체임을 깨달았다. 영화의 아름다움은 수많은 다른 예술, 다른 이슈로 연구자들을 인도한다는 점이다. 영화는 우리의 지적 지평을 확대하는 멋진 수단이다. 게다가 영화는 언어를 몰라도 그냥 보는 것만으로 어느 선까지 직관으로 이해할 수 있는 초월성이 있다. 글 김혜리 vermeer@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

데이비드 보드웰 저서 목록

<영화예술>(Film Art1, 1996, 5번째 개정판) *이론과 실천에서 한국어 번역본 출간

<칼 드레이어의 영화들>(The Films of Carl-Theodor Dreyer, 1981)

<고전 할리우드 시네마>(The Classical Hollywood Cinema:Film Style and Mode of Production to, 1960) 재닛 스타이거, 크리스틴 톰슨과 공저(1985)

<픽션 영화의 내레이션>(Narration in the Fiction Film, 1985)

<오즈와 영화의 시학>(Ozu and the Poetics of Cinema, 1988)

<의미 만들기>(Making Meaning, 1989)

<에이젠스타인의 영화>(The Cinema of Eisenstein), 1993)

<세계영화사>(Film History: An Introduction, 1994) 크리스틴 톰슨이 저자로 우선 명기된 공저4* 시각과 언어에서 한국어 번역본 출간

<포스트 이론>(Post-Theory:Reconstructing Film Studies, 1996) 노엘 캐롤과 공동으로 펴냄

<영화 스타일의 역사>(On the History of Film Style, 1997)* 한울에서 한국어 번역본 출간

<플래넷 홍콩>(Planet Hong Kong: Popular Cinema and the Art of Entertainment,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