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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바나 베스트 음반 <Nirvana>
2002-12-12

미진한 선물,그러나 네버마인드

이제 와 생각하면 너바나(Nirvana)라는 ‘현상’은 마치 화염방사기처럼, 듣는 이를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덮치고 지나가버린 그 무엇이었다. 록 장르가 말초신경을 간질이며 돈을 갈구하는, 약간 더 하드한 ‘팝송’으로 귀결되었다고 누구나 여기던 1990년대 초반, 너바나(와 시애틀의 그런지 동료들)는 돌연 록을 ‘순수함’의 고갱이로 바꿔놓았다. 이들의 노래는 염증나는 세상에 대한 자기 파괴적 분노로 가득 찬 ‘저항 음악’이었다. 록 음악에서 저항은 1970년대 중반 펑크 록을 끝으로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라 체념했던 팬들을 완전히 압도한, 예기치 못한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이들의 음악을 기존의 활력없던 록 신을 완전히 ‘대체’한다는 뜻의, 얼터너티브 록이라 불렀다.

<Nevermind>로 점화된 너바나의 신화는, 그러나 돌연 끝나버리고 말았다. 리더 커트 코베인의 자살(1994년 4월5일) 때문이었다. 스타덤을 못 견딘 자기 파괴의 욕망이 일차적인 원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늙기 전에 죽어버리겠다”는 록 뮤지션의 순수 강령을 드물게 지켜낸 영웅이자 순교자가 된 것이다. 불행한 것은, 커트 코베인의 죽음과 함께 얼터너티브 록도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순결’의 의도를 품고 발발된 록의 도도한 흐름이, 상업자본과 매너리즘의 거대한 손길과 맞닥뜨려 ‘타협’의 나락으로 빠지고 만 것이다. 그런지는 그저 쿨한 ‘트렌드’가 되어갔고, 너도나도 멋지게 보이기 위한 메이크업이 되었다. 이제 록에서 ‘저항’이라는 말은 ‘구리다’의 상투구가 되고 말았다.

오랜 진통 끝에 드디어 세상에 등장한 컴필레이션 <Nirvana>는 마음을 착잡하게 만드는 음반이다. 록의 순결한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구현해낸 너바나의 풍모를 ‘선물용’으로 마주해야 하는 괴로움이 있고, ‘상업적’으로 보아도 별로 장점이 없어 보인다. 커트니 러브와 너바나의 나머지 멤버들이 아웅다웅해가며 내놓은 결과물치고는 퍽 초라한 것이다. ‘베스트 음반’의 첫째가는 덕목이 풍부한 ‘보너스 트랙(미발표곡)’일진대, 사운드가든과 앨리스 인 체인스의 영향이 짙게 풍기는 달랑 한곡뿐이다.

그렇지만 <Bleach>부터 <MTV Unplugged In New York>에 이르는 너바나의 정규 음반에 실린 주요 대표곡이 착실하게 등장하는 <Nirvana>를 들으면, 가슴 한켠에 주체하기 힘든 파동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컴필레이션의 장점 중 하나인 ‘앉은자리에서 멈춤없이 일괄처리되는’ 너바나의 연대기가 펼쳐진다. 어두운 방구석에서 워크맨으로 <In Utero>를 듣다가 날벼락처럼 커트 코베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그날’로 자꾸만 돌아가려는 것이다.

어쩌면 <Nirvana>는, ‘음모론’의 신호탄일지도 모른다. 이 음반의 발매를 전후하여 시애틀 그런지의 ‘원조’들이 하나둘씩 기지개를 켜는 것이 그냥 우연일까. 사운드가든의 크리스 코넬이 RATM의 멤버들과 손잡은 오디오슬레이브, 너바나와 쌍벽을 이루었던 펄 잼의 재기, 스매싱 펌킨스의 지주였던 빌리 코건의 새 밴드 즈완 등, 돌연 록계는 ‘얼트 록 리바이벌’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그 시절 그 얼굴’들이 모처럼 활기찬 움직임으로 록계를 장악하려는 시도는 제법 흐뭇하기까지 한 광경이지만, 자꾸만 ‘영원히 늙지 않는’ 커트 코베인의 얼굴이 겹쳐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때를 추억하려니 불가피하게 드는 상실감 때문인지도 모른다.(유니버설 발매)오공훈/ 대중음악칼럼니스트 http://www.gho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