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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홍련><살인의추억> 등 프로덕션디자인의 매력 <3>
2002-12-13

프레임을 빚는 마법의 손

<살인의 추억>리얼리티가 초현실로 바뀔 때

어떤 영화‥‥‥‥‥‥‥‥

1986년 경기도의 한 마을에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됐을 때만 해도, 이건 그저 ‘단순한’ 살인사건이었다. 하지만 주변 곳곳에서 여인들이 차례로 목숨을 잃기 시작하자, 이 일련의 사건은 하나의 이름 아래 불리기 시작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이 그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살인의 추억>은 아직까지 미궁에 빠져 있는 이 사건의 심장부 속으로 들어간다. 아니, <살인의 추억>은 차라리 이 공포스런 사건을 포함한 그 시대, 그곳을 지금, 여기로 소환해내는 영화다. 박두만과 서태윤이라는 대조적인 성격의 두 형사를 통해 이 사건을 조명하는 이 영화는 스릴러적인 재미를 추구하기보다 죽음의 공포와 고통을 정면으로 느끼게 해주며, 당시의 풍속도보다는 이 사건 위에 드리워진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여주는 데 집중하게 된다. 또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없도록 한 시대의 경직된 분위기, 과학수사보다는 막연한 감으로 접근한 경찰사회 등이 비쳐진다.

이미지 컨셉‥‥‥‥‥‥‥‥

실제 사건으로부터 출발한 작품인 탓에 이미지의 원천은 당시의 사건 보도사진이었다. 이 사진들은 시나리오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게 봉 감독의 이야기. “예컨대 실제 시체를 놓고 경찰과 기자들이 바라보고 있는 사진이 있다. 거기서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감흥이 생겼다”고 설명한다. 그 무뚝뚝하고 생뚱맞은 표정들에서 당시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없도록 만드는 어떤 기운 같은 것을 느꼈다는 얘기. 또 당시 현장검증을 하기 위해 한 경찰관이 여학생의 교복을 입고 있는 사진은 우스꽝스럽기도 하면서 무언가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봉 감독이 생각한 가장 중요한 이미지 컨셉은 시대의 질감을 표현하는 빛과 어둠처럼 이질적인 요소의 강렬한 대비다. 당시 보도사진의 언저리에서 읽혀진 묘한 시대적 기운은 빛과 어둠처럼 이질적인 요소가 극단적으로 충돌하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런 구도는 영화 첫 장면에서부터 드러나는데, 마치 아늑한 전원인 듯 밝은 태양 아래의 논에서 이내 여성의 시체가 있는 하수구 속의 어둠으로 장면은 급전환된다. 배수관 속에 다소곳이 누워 있는 여성의 시체라든가 나지막한 농촌과 변두리 풍경 위에 도사리고 있는 공장의 위압적인 모습 등도 이러한 느낌을 전하기 위한 이미지들. 이런 대비는 이미 <플란다스의 개>를 통해 일상적인 공간인 아파트 복도에서 절박한 추격전이 벌어진다든가 보일러실에서 조금은 음험한 일이 벌어지는 등의 상황을 표현했던 봉 감독다운 발상이기도 하다. 이런 분위기는 봉 감독이 헌팅하기 전 참조했다는 신디 셔먼의 사진 <Untitled Film Still #48>에서도 얼마간 드러난다.

공간의 이미지‥‥‥‥‥‥‥‥

영화의 주된 공간은 야외다. 오픈세트를 포함해 65∼70% 정도가 야외이며, 밤장면은 40%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때문에 공간을 만들어나간다기보다 적절한 공간을 찾아나서는 헌팅은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였다. 프로덕션디자인을 책임진 류성희 미술감독은 봉 감독과 함께 헌팅을 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일을 겪었다. 평범한 듯 보이는 논의 모습은 어떤 순간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발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놀라울 정도로 무섭고 그로테스크한 표정을 발휘한다는 것.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익숙한 리얼리티가 갑자기 초현실주의적으로 돌변할 때”가 있다는 거다. 특정한 계절이나 시간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표정을 바꾸는 농촌의 이미지를 포착하고 이를 창조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용의자와 형사들의 추격신이 벌어지는 공간인 벼 벤 뒤의 논도 이런 생각을 품고 만들어졌다. 낟가리의 높이를 조절해 그림자가 괴이한 이미지를 보이도록 했다.

또 하나의 주요 공간인 경찰서 내부도 시대적인 어둠을 드러내면서도 캐릭터들의 심리 상태를 보여줄 수 있도록 설계됐다. 류성희 감독 등은 전국의 대부분 경찰서를 돌아다니며 세트를 구상했다. 우선 머리 위로 굵은 기둥과 전기선이 지나가게 함으로써 심리적인 집중, 고민 등을 드러낼 수 있도록 했고, 봉 감독의 주문에 따라 지하 취조실의 높이를 실제보다 훨씬 높게 해 명암의 대비를 강하게 줄 수 있도록 했다. 상반된 요소의 충돌이란 요소는 경찰서 세트를 만들 때도 적용됐다. 봉 감독은 보일러실을 임시 취조실로 사용하는 것으로 설정해, 이질적인 요소를 한 공간에 몰아넣었다. “심각한 취조를 하면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데, 보일러 기사가 슥 나타나서 달그락거리며 보일러를 만지고 간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겠는가. 한마디로 ‘야메’ 같은 느낌을 주고 싶다.”

헌팅 & 세트‥‥‥‥‥‥‥‥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헌팅에 들인 시간은 무려 10개월. 무엇보다 80년대, 그리고 그 이전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공간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제작진이 “리얼하게 가되, 시대적인 느낌은 과장해서 표현하자”고 판단했던 이유는 현재의 공간에 80년대의 유산이 남아 있듯, 80년대 공간에는 60∼70년대의 잔재가 남아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논 한가운데 아파트나 공장이 들어선 경우가 너무 많아 연출부와 제작부는 ‘상대적’으로 덜 개발된 전라도의 곳곳을 훑어내야 했다. 어렵사리 찾은 공간도 개발이 진행돼 한 장면을 찍고 이어지는 장면을 위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더 나쁜 경우엔, 불과 몇 개월 전엔 전원 풍경이었던 곳에 갑자기 큰 건물이 들어서 있기도 했다. 어떤 추격장면의 경우 영화에선 논 사이로 뛰어다닌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남 남평에서 시작해 남원을 거쳐 전북 익산에서 마무리되는 형국이었을 정도. 결국 야외촬영은 전남북 40여곳을 돌아다닌 끝에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사무실을 들른 김지운 감독은 로케이션 장소를 빨간색으로 표시한 지도를 보고 “이거 농협 위치를 표시한 거냐”고 묻기도 했다.

이 영화의 한 장면‥‥‥‥‥‥‥‥

강력반 형사들이 회식하는 이 장면을 찍은 곳은 전라도 어느 곳의 버려진 공간을 개조한 오픈세트. 좁은 공간에 카메라 위치까지 고려해야 했기에 신경 쓸 구석이 많았다. 류성희 감독은 의상에서부터 방 구석까지 80년대의 옷을 입혀야 했다. 삼겹살 기름에 찌든 벽지의 꼬질꼬질한 느낌을 내기 위해 벽지에 특수처리를 했고, 다락 안쪽을 을씨년스런 분위기로 만들었다. 문에 걸린 자그마한 커튼은 어수룩한 분위기를 더욱 살려준다. 봉준호 감독은 송강호 뒤로 보이는 연예인의 사진을 전영록, 이지연, 김완선의 것으로 해달라는 데까지 꼼꼼히 체크했다.

프로덕션디자이너 류성희

<꽃섬> <피도 눈물도 없이> 등 미술적인 요소가 강조되는 작품에서 프로덕션디자인을 담당해온 류성희 감독은 “이 작품에선 전체적인 톤에 맞게 드러나지 않는 미술 작업을 했다”고 설명한다. 특히 80년대의 이미지가 상당수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기에, 그러한 리얼리티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나름의 색깔을 내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말한다.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주어진 공간 속에서 시대적 분위기나 캐릭터의 내면 등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심었다는 것. 심지어 수로에 시체가 버려진 장면을 찍으러 갔는데, 어느새 풀이 다 뽑혀 일일이 심어야 하는 등 자연을 ‘개조’하거나 배경이 되는 소도시의 간판을 싹 바꿔야 하는 등 그야말로 “티도 안 나는” 일을 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촌스릴러’라는 신종 장르나 ‘<쎼븐>과 <전원일기>의 결합’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분위기를 이 세상에 처음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져 즐겁다고 말한다. 유랑극단처럼 끊임없이 옮겨다니며 작업해야 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힘들었다지만 말이다. 글 문석 ssoony@hani.co.kr 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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