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아가씨 vs 건달
아저씨가 영화 <해안선>에 부여한 의미 한 토막
2002-12-13

음,불편하군

김기덕 감독의 <해안선>을 보다가 소설가 박완서씨의 수필 한 대목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 전에 읽은 글이어서 기억이 또렷하지는 않으나, 얼추 이런 뜻이었다. 자신은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는데, 아들이 의과대학엘 들어갔다는. 우리 사회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회에서 의사는 큰 존경과 높은 수입을 누리는 직업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 자식이 의사가 되기를 바라고, 의사 자식을 둔 부모를 부러워한다. 그런데 박완서씨는 왜 자식이 의사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는가 자식의 눈에 들어올 것들이 끔찍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겉만 보며 살아도 눈이 힘든 때가 많은데, 왜 굳이 속까지 들여다보아야 하는 직업을 고른담, 하는 투로 박완서씨는 얘기했던 것 같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몰라도, 자발적으로 흉한 것까지 보고 살아야 하나, 하는 것이 박완서씨 심정이었던 것 같다. 그 대목을 읽으며 나는 ‘개인적으로’ 크게 공감했다. 의과대학에 지원할 수 있을 만큼 고등학교 성적이 좋지는 않았던 터라 내게는 언감생심이었겠지만, 내게 충분한 학업 능력이 있었더라도 의과대학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몸 속까지 들여다보는 것을 업으로 삼을 용기가 내게 없(었)기 때문이다.

<해안선>은 김기덕 감독의 작품 가운데 그 날것의 육체성(보다는 잔혹성이라는 말이 낫겠다)이 덜 드러난 영화라고 한다, 고 남 얘기를 빌려 말하는 것은 그 영화에서 내가 김기덕 감독을 처음 만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군데군데서 마음이, 따라서 몸이 불편해 어쩔 줄 몰랐다. 사람의 육체는 그의 카메라 안에서 푸줏간의 고기처럼 다뤄지고 있었다. 물론 나는 사람과 개돼지의 고깃덩어리가 물리적으로, 화학적으로 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유구한 인간중심주의에 젖어 있는 내 몸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문명의 기반이 폭력이라는 것을 내 머리는 알고 있지만, 내 가슴은 그 폭력이 적어도 자연상태의 폭력보다는 낫다고 말한다. 나는 능지처참을 당하는 것보다는 가스실에서 죽는 것이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다.

<해안선>의 잔혹한 장면들을 통해서 감독은 무엇을 노렸을까 사실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무얼 말하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아무 말도 안 할 생각이었다고 말한다면 할말 없지만). 그것은 집단 속에서 허물어져가는 개인일까 분단상황의 폭력성일까 인간의 본원적 비루함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잔혹한 장면들(과 그 속의 적나라한 성애)은 그 메시지의 전달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이 잔혹한 장면들은 예술적으로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세계가 잔혹하므로 영화는 그 잔혹함을 반영해야 한다, 고 작가를 옹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어떤 중독 현상의 기미를 읽을 따름이다. <해안선>의 감독과 비슷한 감정을 내게 불러일으킨 감독은 미카엘 하네케다. 나는 그의 <퍼니게임>과 <피아니스트>를 매우 불편한 마음으로 보았다. 모든 진정한 예술은 그 향유자의 마음에 어떤 불편함을 낳는다. 그러나 내가 <퍼니게임>에서 받은 불편함은 그런 종류의 불편함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어떤 반성으로 이어지는 불편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환자든 의사든 르포라이터든) 정신과 병동에서 겪어야 하는 불편함에 가까웠다. 그런 잔혹함의 나열이 인간의 정신을 어떤 식으로든 고양시킬 수 있을까

<해안선>에서 강 상병이 정신을 놓아버리는 것은 자신이 쏜 총에 맞아죽은 사람이 간첩이 아니라 민간인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가 선뜻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 민간인은 그냥 민간인이 아니라, 자신을 조롱해대던 동네 건달이기 때문이다. 강 상병은 ‘오인 사살’사건이 있기 바로 전, 그 건달패에 당한 조롱에 모욕감을 느끼고 강한 적의를 드러낸 바 있다. 그런데 그가 그 건달의 죽음에서 자기 마음을 망가뜨릴 만큼 가책을 느꼈을까 그래, 느꼈을 수 있다. 그는 그만큼 선량하고 섬약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가 만일 ‘진짜 간첩’을 쏘았더라도 그만큼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까 느꼈을 것 같다. 그는 선량하고 섬약한 사람이므로. 그렇다면 ‘오인 사살’이라는 설정은 왜 필요했을까

<해안선>은 군인을, 더구나 군인 가운데 군인이라는 해병대원들을 끝간 데까지 희화화한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군대에 대한 정치적 이념적 금기를 깼다면, <해안선>은 그보다 훨씬 더 과격한 방식으로 군대에 대한 문화적 금기를 깨고 있다. 영화 속에서 군인들은 단지 ‘나쁜 놈들’로만 그려지는 게 아니라 ‘못난 놈들’로도 그려진다. 김기덕 감독 자신이 해병대 출신이라고 한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해병대를 이렇게 희화화할 용기를 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식구에게 당하는 조롱은 웃어넘길 수도 있지만, 똑같은 조롱을 ‘남’에게 들으면 불쾌감이 훨씬 더 큰 법이니. <해안선>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바로 거기 있을 것이다. 한국영화가 조롱할 수 없는 대상은 이제 없다는 것을 보여준 데에.고종석/ 자유기고가 aromach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