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News > 국내뉴스
이 여자가 사이코라 생각해요? <피아니스트>
2002-12-18

영화 <피아니스트>는 슈베르트와 슈만, 브람스의 선율을 타고 흐르는, 중년의 피아니스트와 그에게 매혹된 젊은 남성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에 덧붙여 영화를 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휴양지에서 단란한 한 가족이 두 젊은이에 의해 이유없이 잔인하게 살해되는 과정을 담은 <퍼니 게임>(1997)의 미하엘 하네케가 이 영화의 감독이라는 사실이다. <피아니스트>에서도 하네케는 로맨스에 대한 관객의 예상과 기대를 여지없이 배반하며 당혹스럽고 불편한 여정으로 안내한다.

40대의 독신여성 에리카 고후트는 오스트리아 빈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다. 에리카는 시간대별로 딸의 동선을 체크하며 옷 한벌 사는 것도 간섭하는 어머니와 둘이 산다. 늘 웃음기 없는 얼굴로 학생들을 가혹하게 가르치는 에리카에게 어느날 젊고 잘생긴 청년 발터가 나타난다. 에리카가 연주하는 모습에 매혹된 발터는 공학도이면서도 뛰어난 피아노 연주실력으로 음악원에 입학해 에리카의 지도를 받게 된다. 발터는 에리카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고백하지만 에리카로부터 도착적 성행위를 요구받고 당황한다.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에, 교수다운 단정한 옷차림, 언제나 손에는 장갑을 낀 채 에리카가 수업을 끝내고 찾아가는 곳은 포르노숍이다. 그곳에서도 그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표정으로 포르노를 보면서 쓰레기통의 정액 묻은 휴지를 꺼내 냄새를 맡는다. 또한 자동차 극장에서 카섹스를 하는 젊은 커플을 훔쳐 보며 소변을 참지 못하고, 목욕탕에 앉아 벌린 두 다리 사이에 면도날을 들이댄다. 원작소설 <피아노치는 여자>의 작가인 엘프리데 엘리아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에리카의 취미는 자신의 몸을 베는 것이다.”

학생들의 발표회 날 공중 화장실에서 기이한 성적 접촉을 한 뒤 에리카는 집으로 온 발터에게 깨알 같이 글씨가 적힌 종이다발을 준다. 거기에는 자신을 묶고 때리며 강간해 달라고 적혀 있다. 발터는 실망과 모멸감에 몸을 떨지만 다시 에리카를 찾아온다. 에리카는 간절히 원했으나 결코 실현되지 않기를 바랐던 소망을 처참하게 이룬다.

하네케 감독은 에리카의 비틀리고 모순된 욕망의 근원을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거리를 둔 관찰자의 시선으로 따라갈 뿐이다. 그리고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이 여자는 정신병원에 가두어야 할 사이코인가. 질문을 피하기 위해 극장을 나올 수는 있겠지만 명쾌하게 대답하기란 쉽지 않다.

<피아니스트>는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도대체 이 영화의 메시지는 무엇인가”라고 쏟아지는 질문에 하네케는 에리카라는 인물이 “유감스럽게도 현대인이 지금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른 결과물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 영화에서 에리카를 연기한 이자벨 위페르와 발터역의 브누아 마지멜은 각각 남녀연기상을 수상했다. 특히 이 작품으로 두번째 칸 연기상을 수상한 이자벨 위페르로 인해 <피아니스트>는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시종 무표정하고 냉담한 에리카의 얼굴에는 좌절한 인간의 날카로운 비명이 베어진 면도날의 흔적에서 흐르는 피처럼 배어나온다. 두시간의 편치 않은 여정을 털어버리고 싶은 관객이라고 해도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에서 입을 앙다문 위페르의 얼굴을 잊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20일 개봉.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