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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아 감독의 독립장편영화 <그집앞> [2]
2003-01-04

골방에서 길 위로, 욕망이 나를 데려다 주리라

도희도 가인보다는 동선이 많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도희가 영화에 등장하는 시점은 이미 유럽여행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와 임신을 확인하는 때이다. 그 장면은 잠깐이고 얼마 안 있어 트렁크를 들고 집을 나간 뒤, 바로 다음 서울 거리를 트렁크를 끌며 배회하는 그녀의 모습이 이어진다. 사건의 디테일은 과감히 생략돼 있고, 갑작스런 한국행을 택한 도희의 심기 역시 그녀가 미국 집의 전화기에 남긴 메시지의 형태로 암시될 뿐이다. “여보… 나야. 거기는 지금 밤늦은 시간일 텐데…. 집에 없네. 나 지금 아주 멀리, 아주 멀리 와 있어. 쪽지만 하나 남기고 사라져버려서… 미안해. 그런데… 지금은… 아직은 당신하고 이야기할 수가 없어. 조금만 생각이 더 정리되면 그때 이야기할게….” 픽션으로 새로 가공되고 여러 인물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처럼 <그집앞>의 톤은 <김진아의 비디오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보인다. 여전히, 김진아 감독은 “여성의 몸과 욕망”을 “여성 자신의 심리를 그림으로써” 드러내고자 한다. “사건 중심으로 가는 것보다, 내면심리를 그려내는 게 더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메시지라기보다는, 그저 여성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에요.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폭로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뽀삐>나 <우렁각시>처럼 초저예산으로 독립 장편극영화들이 하나둘씩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집앞>은 그 가운데서도 독특한 케이스임에 틀림없다. 이 영화는 극의 내용상 미국과 한국에서 나뉘어 촬영됐고, 미국에서는 피터 그레이, 한국에서는 베니토 스트란지오라는 다른 촬영감독이 각기 다른 디지털카메라로 찍었다. 인물도 미국 촬영분에는 가인만 나오고, 한국촬영분에는 가인 없이 도희와 희수가 번갈아 등장한다. 가인역의 최윤선, 도희역의 이선진 모두 오디션으로 뽑았다. 정찬은 김 감독이 <로드무비>를 보고서 캐스팅했다. 제작비는 후반작업 비용과 홍보비 등을 제외한 순수제작비가 1억원가량 들었는데, 그중 3천만원은 영진위에서 지원받았고 나머지 7천만원가량은 김진아 감독과 그녀의 남편이기도 한 LA 어바인대학 교수 김경현씨가 설립한 독립영화사 ‘픽처 북 무비스’가 사업체 융자를 받아 충당했다. 장편극영화를 완성하기에는 빠듯한 액수인 이 예산이 지켜질 수 있었던 데에는 배우와 스탭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큰힘이 되었다. 정찬이 노개런티를 자원한 것을 비롯해, 배우들뿐만 아니라 두명의 촬영감독들도 그리 많지 않은 수당으로 이 영화에 참여했다고 감독은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친구>와 촬영감독을 맡으며 한국영화와 이미 인연을 맺어온 피터 그레이나 피터 그리너웨이의 <필로우 북> 등에서 카메라 오퍼레이터를 했던 베니토 스트란지오 등 두명의 촬영감독은 ‘저예산영화’ <그집앞>이 자랑하는 ‘화려한’ 스탭진이다. 김진아 감독이 부산영화제 등을 통해 친분을 쌓아 자연스럽게 함께 일하게 된 이 두명의 촬영감독은 <그집앞>의 질적 완성도를 어느 정도 보장해주고 있는 듯 보인다.

두 여자, 두 나라, 두 촬영감독

두 촬영감독이 나누어 찍은 <그집앞>은 ‘가인’을 그리는 미국 촬영분과 ’도희’를 따라가는 한국 촬영분에서 촬영스타일의 대비를 보인다. ‘가인’을 찍은 피터 그레이는, ‘DSR 500’ 기종 카메라를 사용하고 거의 대부분 삼각대를 써서 집안에 칩거하는 가인을 밀폐된 느낌이 나게 무겁게 담아냈다. 반면 ‘도희’를 찍은 베니토 스트란지오는, 좀더 가벼운 ‘PD 150’ 기종카메라를 가지고 대부분 핸드헬드 기법으로 길 위를 떠다니는 도희의 행보를 자유로이 좇았다. ‘가인’의 촬영분은 블루톤이 주조를 이루고, ‘도희’의 촬영분은 빛바랜 컬러사진 같은 색감을 의도했다고. 시나리오는 ‘가인’과 ‘도희’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김진아 감독은 이 두 부분을 시나리오대로 나누어 붙이거나 아예 뒤섞어 교차편집을 하거나 두 방법 중 하나를 조만간 택할 예정이다. 교차편집을 할 경우 영화는 각기 다른 촬영스타일이 반복적으로 교차되면서 시각적인 느낌을 더욱 풍성하게 할 것으로 보인다.

<그집앞>은 감독이 자신을 대상으로 찍었던 다큐를 확장하고 거기에 픽션을 섞은 극영화이다. 이 독특한 작업에서 김 감독은 전에 자신이 도맡았던 ‘촬영자’와 ‘배우’의 두가지 역할을 다른 이들에게 넘겼다. 자신이 직접 촬영자이자 피사체가 되는 대신 자신의 의사를 촬영자와 배우에게 전달하고 그들을 통해 표현해 내려고 했다. “촬영의 경우 한컷한컷 정사진으로 미리 구도를 찍어 촬영감독에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여전히 촬영감독이 가진 스타일이 녹아날 것이다. 배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 똑같이 할 수 없고 배우의 습성적인 면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부분들이 긍정적인 결과로 나와 만족한다.”

김진아 감독에게 <그집앞>의 작업은, 스스로가 ‘가인’에서 ‘도희’로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골방에서 오로지 혼자서 아무에게도 보여줄 생각 않고 비디오다이어리를 찍었던 그녀가 세상으로 나와 배우와 촬영감독, 그리고 가공된 스토리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이 작업의 결과가 어떻게 완성돼 나올지 기대된다. 한국쪽 공동제작사인 청년필름은 후반작업 비용을 마련해 작업을 마치는 대로 개봉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글 최수임 sooeem@hani.co.kr·사진 이혜정 socapi@hani.co.kr

촬영감독 베니토 스트란지오“함께 만들어가는 기분이 좋다”

<그집앞>의 한국쪽 촬영감독을 맡은 베니토 스트란지오는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네덜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난 네덜란드 촬영감독이다. 2001년 부산영화제에서 김진아 감독과 알게 됐다. ‘영화에 대한 심미안이 일치한다’는 데 입을 모으는 두 사람은, 이번 <그집앞> 작업에서도 거의 의견의 충돌없이 좋은 호흡으로 함께 일했다고 한다. 열여섯살 때 일본 감독 신도 가네토의 <오니바바>를 보고 감명을 받아 영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는 스트란지오는, “꼭 한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아시아에서 일을 해보고 싶었”던 차에, 김진아 감독의 <그집앞>에 흔쾌히 동참했다. 이번이 아시아 감독과는 첫 작업. 베니토 스트란지오의 이력에서는 그가 카메라 오퍼레이터로 참여한 <필로우 북> 등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가 눈에 띈다. 대가와 작업을 함께 했던 그로서는 신인 감독 김진아와의 작업이 퍽 새로웠을 듯. 스트란지오는 “긴밀히 의논하며 함께 만들어갈 수 있어서” 이번 작업이 좋았다고 한다. 스트란지오는 피터 그리너웨이 영화 이외에도 네덜란드에 이민 온 중국 사람 ‘재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재키>의 촬영감독을 맡은 바 있으며, 자국에서 저예산 독립영화 작업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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