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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있는 립싱크,알리야의 <Miss You>
2003-01-08

박은석의 뮤직비디오 비평

립싱크를 파렴치한 행위로 간주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프로테스탄트적 직업 윤리에 대한 배반을 의미한다는 점에 있다. 공사장 인부가 벽돌을 쌓음으로써 임금을 지불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을 만들고 노래를 부름으로써 금전적 이익을 취하는 한 뮤지션 또한 직업인으로서의 윤리적 덕목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물론 직무의 수행과정에서 계량화하기 힘든 예술적 가치기준이 적용될 뿐만 아니라 그 대중적 영향력이라는 변수마저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뮤지션은 일반적인 샐러리맨들과 구별된다. 하지만 미리 녹음된 음악에 맞춰 입만 벙긋거리는 가수에 대한 비판은 골목 안쪽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겠다고 우기는 택시기사에게 울화가 치미는 것과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뮤지션들이 지나치게 많은 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까다로운 잣대에 의한 편파판정 따위가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요구조건이며, 방송 프로그램의 제작 편의를 위해 립싱크를 밥먹듯 하는 우리의 현실에 오히려 문제가 있는 것이다.

뮤직비디오는 그런 점에서 다시 한번 흥미로운 매체이다. 공연 실황 필름이 아닌 이상, 쇼트-폼 비디오에서 립싱크를 문제 삼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뮤지션이 제정신이라면 눈 덮인 설산 꼭대기나 바다 한가운데서 실제로 노래를 불렀을 리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보통 사람들의 상식선인데다, 궁극적으로 뮤직비디오의 제작은 (음반의 그것이 아니라) 철저히 영화의 방식에 의한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이 용인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처럼 각기 다른 기준을 요하는 측면 때문에 부작용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다. “우월한 비주얼 이미지가 앨범을 팔아준다”는 인식이 급속도로 확산된 MTV 개국 초기의 분위기 속에 등장한 수많은 함량미달의 ‘예쁘장한’ 뮤지션들이 비평가들의 집중포화를 받았던 것을 보라. 가사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모델 둘을 뮤지션이라고 팔아먹은 것도 모자라 그래미 어워드 신인상까지 타냈던 저 유명한 ‘밀리 바닐리(Milli Vanilli) 사건’은 그 가장 적나라한 사례일 뿐이다. 그래서 시앤시 뮤직 팩토리(C+C Music Factory) 같은 (외모에 자신이 없는) 팀은 ‘그림 좋은’ 댄서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자막을 통해 그들의 출중한 외모가 자신들의 것이 아님을 고지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던 것이다.

알리야(Aaliyah)의 신작 <Miss You>의 비디오클립에 흥미가 가는 것도 전적으로 그 ‘립싱크’ 때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비디오클립은 립싱크가 애정과 존경을 표하는 아름다운 행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의표를 찌른다는 점이다. 게다가 토니 브랙스턴, 미시 엘리어트, 퀸 라티파, 릴 킴 같은 유명 흑인 여성 뮤지션들은 물론이고, DMX, 제이미 폭스, AJ 등 남성 래퍼들까지 30여명의 뮤지션이 한자리에 모여 모조리 립싱크를 하는 장면은 마니아들의 희소성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측면도 있다.

그건 이 비디오가 전적으로 알리야를 추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다는 명분에 기인한다. DMX의 엄숙한 조사(弔詞)로 시작하는 이 클립에서 당대의 유명 뮤지션들이 알리야의 목소리에 맞춰 입을 벙긋거리는 행위는 일견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뮤지션들에게 립싱크가 극히 부끄러운 행위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현재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래퍼 DMX를 비롯한 당대의 스타들이 자발적으로 벌이는 ‘붕어 연기’가 감동적일 정도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외면할 수 없게 된다.

알리야는 지난 2001년 8월, 바하마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22살의 짧은 생을 마친 뮤지션이다. 15살 나이에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며 데뷔 앨범 <Age Ain’t Nothing But A Number>를 발표하여 히트를 기록한 것은 물론, R&B 가수 알 켈리와의 결혼으로 세간을 놀라게 하기도 했던 흑인 음악계의 센세이션이었다. 게다가 그 최후마저도 극적인 것이어서 그녀의 죽음은 여전히 강력한 여진을 남기고 있다.

알리야의 죽음을 초래한 것이 바하마에서 진행된 뮤직비디오 촬영 때문이었고 그녀를 추모하는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것 역시 독특한 아이디어의 뮤직비디오 덕분이라는 건 우연의 아이러니일 테지만, 립싱크 따위의 행위를 포함한 과정으로서의 뮤직비디오가 적어도 ‘뮤지션으로서의 생명력’을 좌우한다는 건 이제 더이상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bestles@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