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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파 방송사 연말 대중가요 시상식의 결정적 장면들
2003-01-08

아,감동의 도가니탕

어찌 영화에만 결정적 장면이 있을쏘냐. 지난해 12월29일부터 31일까지 매일 밤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어지럽힌 지상파 방송사 대중가요 시상식에서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엄청난 결정적 장면들이 연출됐으니, 해가 바뀌었다고 모른 척 지나간다면 3시간짜리 생방송에 진땀을 뺀 제작팀과 이를 지켜보느라 눈이 벌겋게 충혈된 시청자들에게 예의가 아닐 터. 더구나 2003년이 밝은 뒤에도 “시상 기준이 모호하다”는 자못 진지한 의문과 “비슷한 형식으로 똑같은 가수들에게 상을 주는 시상식 프로그램을 방송사마다 마련할 필요가 있느냐”는 이유로 프로그램 통폐합론이 제기되는 등 일회성 프로그램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강한 여운과 파장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한해에 꼭 한번씩만 방송되는 희귀성, 트로피를 빌미로 가요계 톱스타들을 세 시간 내내 묶어두는 대담한 섭외 방식, 같은 시간 이웃 방송사에서 중계하는 연기 대상이나 코미디 대상 시상식과 번갈아 보아도 전혀 무리가 없는 접근의 용이성 등등 연말 대중가요 시상식(이하 시상식)의 강점은 일일이 열거하자면 입만 아프다. 그러나 시상식의 가장 큰 마력은 뭐니뭐니해도 시청자들의 뒤통수를 가격할 기세로 시시각각 터져나오는 온갖 결정적 장면에 있다 할 것이다.

지난해 12월29일 <SBS 가요대전> 방송 현장, 신인상을 차지한 비와 별의 특별 공연에 박진영이 등장하면서 무대 위에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박진영이 누구인가. 인기가수에서 대박 프로듀서로 변신한 뒤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대중음악계의 큰 손. 비와 별에 이어 노을이라는 이름의 가수를 속속 데뷔시킴으로써 가요계에 자연주의 예명 바람을 몰고온 이가 아닌가. 그러나 박수와 환호, 클로즈업 세례를 받은 박진영에게 진행자인 이문세가 “오늘은 박진영씨의 날인 것 같다”는 화끈한 찬사를 날린 것은, 다가올 결정적 장면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잠시 뒤, 강타의 특별 공연에 보아와 문희준이 가세하더니 급기야 현진영이 무대 뒤에서 뛰어나왔다. 이들이 왜 몰려나왔는지 어리둥절해하는 시청자들을 위해 이문세는 “여러분, SM 패밀리였습니다!”라는 결정적 대사를 날렸으니, 시청자들은 비로소 이날 시상식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렇다. 시상식은 박진영이 이끄는 JYP와 이수만이 이끄는 SM을 비롯한 국내 대형 기획사들이 자사가 보유한 톱스타들의 머릿수를 과시하고, 평소 방송 프로그램 제작과정에 있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커밍아웃’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계가 몇몇 대형 기획사와 이들이 키워낸 스타를 밑천으로 삼는 방송사들간의 굳건한 연대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이처럼 뻔뻔하리만치 솔직하게 고백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시청자들의 뒤통수를 얼얼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날의 특별 공연이야말로 결정적 장면의 최고봉으로 대접받아 마땅할 것이다.

연말 방송사 3사 시상식 무대에 오른 수상자들의 면면은 또 어떤가. 남들은 평생 한번 할까말까한 수상소감을 피력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서두에 “아무개 사장님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사.장.님. 감격의 순간에 그들의 뇌리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길러주신 부모님이나 자신의 음악에 영감을 준 선후배 음악인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부모’인 사장님이었다. 이처럼 대중음악계 현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수상자들의 황당하리만치 솔직한 수상소감은 도저히 놓칠 수 없는 결정적 대사가 아니겠는가.

아, 그러나 어떤 결정적 장면보다도 시청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준 명장면 중의 명장면이 있었으니 <SBS 가요대전>의 네티즌 선정 최고 인기상 발표 장면이었다. 진행자의 말을 대충 옮겨보기로 하자. “일정 기간 동안 네티즌들의 투표를 통해 선정한 네티즌 인기상에 장나라와 신화가 공동 선정되었습니다!” 설명이 필요없는 명·장·면. 본상 15명(팀) 외에 15개 부문별 수상자를 따로 선정하고도 모자라, 7개 부문에서 2명, 3명까지 공동 수상자를 선정하는 독특한 시상 스타일을 선보인 SBS는 네티즌 선정 최고 인기상 공동 수상자를 발표함으로써 ‘이 땅의 네티즌들이 장나라와 신화에게 단 한표의 차이도 없이 똑같은 사랑을 퍼부었다’는, 그 가치를 따질 엄두조차 안 나는 특종을 선사하고야 말았다.

이쯤 되면 음반판매량과 네티즌 투표, 각종 차트 등 그 어떤 공식적인 경로를 동원해 집계해도 젊은 층이 선호하는 가수들 위주로 시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개탄한 나머지 ‘청소년 부문’과 ‘성인 부문’이라는 전대미문의 부문을 만들어 공영 방송으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한 <KBS 가요대상>은 결정적 장면 선정에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이다. 오호, 오호 통재라!이미경/ <스카이라이프> 기자 friend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