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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시원, 혹은 잠언
2001-07-15

70년 전의 유령이 부활한다. 죽은 자의 조각난 육신에 과학의 신화를 불어넣고, 수천년 전에 사멸해간 원혼에 강신술을 행하면서 죽은 자를 다시 불러들인다. 부천영화제 할리우드 고전 특별 상영작으로 상영될, 30년대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대표작 <프랑켄슈타인> (1931)과 <미이라>(1932)는 그런 점에서 우리를 유령과 마주하게 하며, 30년대를 풍미한 할리우드 공포영화의 원형과 그 기이한 공포의 미적 효과를 탐닉하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들이 단순히 장르를 반복하는 개별적인 작품 목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30년대 미국사회의 상황과 집단 무의식을 드러내는 공포에 관한 잠언이자 ‘영화의 역사’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30년대 미국사회는 대공황의 시대였다. 하지만 영화제작자들에게 있어서 30년대는 장르와 스타 시스템이라는 할리우드 체제의 기둥을 세운 시대였다. 그들은 대공황의 실의와 나락에 빠진 대중에게 영화라는 오락을 제공하면서, ‘현실의 고통을 잊어라’, ‘체제에 순응하라’ 등의 최면을 걸며 반복적으로 장르 영화들을 만들어냈다. 이때 독일 출신의 영화제작자 칼 렘믈이 설립한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선택한 것은 공포와 주술에 관한 경악, 바로 ‘호러’ 장르였다. 그리고 이 장르의 빛과 그림자, 강박증과 공포를 표현하는 듯한 심리적 카메라의 움직임은 파시즘의 망령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들어온 독일 표현주의 계열의 영화인들에게서 수혈받은 미학적 효과였다.

이들에 의해 첫 번째로 제작된 토드 브라우닝의 <드라큘라>(31)는 당대 호러영화의 최고 스타로 명성을 날리던 벨라 루고시를 출연시키며 흥행에 성공하였다. 이에 고무된 유니버설은 여류작가 매리 셸리의 원작소설과 유대인의 ‘골렘’ 전설을 연상시키는 <프랑켄슈타인>을 영화화한다. 유니버설은 이 작품의 연출을 위해 영국 출신의 연극연출가 제임스 웨일을 미국으로 불러들인다. 광적으로 과학기술을 맹신하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에 의해 탄생된 괴물의 비극을 그린 이 작품은 오이디푸스 신화를 과학 기술의 묵시록으로 재생시킨 것이었다.

이 기괴한 영화에 30년대의 관객들은 놀라운 공포를 체험하게 되고, 이 작품에서 괴물로 분한 보리스 카를로프는 영화사상 가장 경악스러우면서도 연민을 일으키는 캐릭터로 각인된다. 한데, 원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역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먼저 그 자리에 캐스팅되었던 벨라 루고시가 두꺼운 분장과 대사조차 없다는 이유로 그 영화를 거부한 것이었다. 결국 보리스 카를로프에게 넘어온 행운의 신은 그 이후, 역시 유니버설에서 제작한 <미이라>로 이어진다. 독일의 촬영 감독 출신이자 30년대 호러영화에 있어서 조명과 유려한 카메라 워크를 통해 미학적인 공포의 효과를 만들어냈던, 칼 프로인트의 <미이라>에서, 그는 수천 년에 걸쳐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부활하는 이모텝으로 분한다.

흥행에 연이어 성공한 유니버설은 <드라큐라>와 <프랑켄슈타인>의 후속작 시리즈를 만들어내게 된다. 30년대까지만도 <프랑켄슈타인>은 2편의 후속작을 더 탄생시키는데, <프랑켄슈타인의 신부>(1935), <프랑켄슈타인의 아

들>(1939)은 모두 제임스 웨일이 감독하고 보리스 카를로프가 주연을 맡은 작품이었다. 30년대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이룩한 <프랑켄슈타인> 식의 호러영화는 40년대 되살아난 시체들의 이야기를 거쳐, 50년대 로저 코만 등이 이룩한 B급 공포영화로 이어진다.

정지연/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