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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영화를 가르쳐준 책 [6] - <영화 만들기>

촬영현장에서 생긴 일

시드니 루멧의 <영화 만들기>

연극의 유산과 텔레비전의 현장성을 잘 결합시킨 시드니 루멧의 영화를 개인적으로 퍽 좋아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들은 국내에서 인기가 높은 편이 못 된다. 주목할 만한 데뷔작 <12인의 노한 사나이>나 <전당포> 같은 고전이 비디오로 출시되지 않았을뿐더러, 명작 <네트워크>도 비디오숍에서 금방 찾기 힘들다. 이런 국내 사정을 고려하면 시드니 루멧이 자신의 영화제작과정을 토대로 쓴 <영화 만들기>는 얼핏 흥미가 덜할 수도 있다. 오히려 한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교과서적으로 충실히 풀이한 다른 이론서가 도움이 클지 모른다.

그럼에도 굳이 <영화 만들기>를 추천하는 것은 이 책이 먼저 연출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실용서이면서도 동시에 영화에 이론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시드니 루멧은 거장답게 자신의 특수한 체험을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그것을 자연스럽게 영화미학으로 일반화한다. 영화 스타일에 관한 그의 견해, 배우의 연기가 필름에 기록되는 양상을 묘사한 부분, 영화음악에 대한 연출가로서의 통찰력 등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이론서라도 전해 주기 힘든 신뢰감이 느껴진다. 따라서 영화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적절한 서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추천 도서로 선뜻 시드니 루멧의 이 책을 떠올린 것은 나 자신의 개인적 체험 때문이기도 하다. 1994년 가을부터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대에서 1년간 객원연구원으로 머무를 기회가 있었다. 인터넷으로 서적을 주문하는 것은 아직 생각도 못할 당시에, 가자마자 들른 서점의 영화 코너에서 먼저 눈에 띈 것은 영화감독, 그리고 배우들의 자서전과 전기물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었다. 서울의 외서 수입점에서는 간혹 서가에 꽂혀 있어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종류의 책들이었다. 구체적인 삶의 모습보다 사변적인 영화이론에 더 가치를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앤드루 새리스를 비롯한 몇몇 교수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작품 분석에서도 그들이 일차적으로 실증적 사실들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서울서 영화와 관련해 지겹도록 들은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용어는 들을 수도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차츰 나는 영화인들의 전기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평소에 좋아하던 빌리 와일더 감독의 할리우드 생활을 길게 기록한 책, <이브의 모든 것>의 배우 베티 데이비스가 스튜디오의 횡포에 맞서 투쟁한 이야기를 담은 전기물을 읽으면서 나는 영화뿐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도 사랑하게 되었다.

시드니 루멧의 책을 읽은 것도 같은 시기였다. 1995년 봄 그는 컬럼비아대 영화과를 방문해 학생들과 함께 <전당포>를 감상한 뒤 방금 출간한 자신의 책 <영화 만들기>를 중심으로 강연을 했다. 비록 이 책은 전기물은 아니었지만 감독 자신의 체험을 기반으로 쓴 영화론이라는 점에서 비슷하게 인상적이었다. 마침 국내에도 번역이 되어 있기에 쉽게 이 책을 추천 도서로 선정할 수 있었다. 조금 빗나간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전기물에 대한 관심에 꽤 인색한 편이다. 며칠 전 서울의 큰 서점에 가 보았는데, 엄청난 양으로 늘어난 영화서적 가운데 영화인들의 전기물은 여전히 찾기 힘들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그리고 <나의 인생 나의 영화>라는 제목의 장 르누아르 자서전 정도였다. 타인의 삶과 체험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관심없이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사랑없이 진정으로 큰 인간이 되는 것이 가능할까. 구로사와 아키라, 장 르누아르, 베티 데이비스는 단순히 일본 감독, 프랑스 감독, 미국 배우가 아니다.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그들은 훌륭한 인생 선배, 자랑스러운 영화 선배이기도 하다. 적어도 영화 학부생들에게는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에 관한 메마른 이론보다는 이같은 서적들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시드니 루멧의 책은 그 훌륭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소개/ 시드니 루멧

1924년 필라델피아에서 출생. <전당포> <개 같은 날의 오후> <네트웍> <허공에의 질주> 등을 만들었다. 4살 때 뉴욕의 연극무대에서 아역배우로 활동하던 시드니 루멧은 26살에 <CBS>에서 연출제의를 받고 감독의 길에 들어섰고 57년 <12인의 노한 사나이들>로 데뷔한 뒤 뉴욕을 본거지로 작업하면서 존 카사베츠 같은 후배를 키우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은 대략 세 덩어리로 묶이는데, 연극을 영상화했거나 가족 문제에 관심을 보이거나 사회 문제를 다루는 영화들이 그것. 장르를 봐도 드라마, 코미디, 로맨스, 뮤지컬 등에 폭넓게 퍼져 있다. 76살인 그는 여전한 현역으로 올해에는 <휘슬> <아름다운 세이든만 부인>, 두편의 영화를 세상에 내놓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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