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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백수 궁상

녀석이 ‘취직’이란 걸 했다. 취직이란 단어하고는 도통 거리가 멀어 보였던 놈이기에 짝짝짝. 3년 동안 곁에서 ‘시중’을 들어준 놈이라 박수 한번 더. 정말 ‘시중들었다’고 말한다면 ‘섭하네’라는 말이 입 속을 뱅뱅 돌겠지만, 10년 나이 많은 사람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스트레스였음을 낸들 왜 모르랴.

“당신 뭐하는 사람인데 시중드는 사람까지 있었어?”라고 물어볼지 몰라서 구차하지만 삶을 조금 공개해야 할 듯하다. 어떤 일간지에서 허락없이 ‘폭로’한 바에 의하면 내가 사용하는 사무실은 네댓평 남짓한 크기다. ‘배운 도둑질’이라곤 글쓰는 것밖에 없어서 먹고 살려면 작업할 공간이 필요해서, 몇명이 촌지를 모아 마련한 곳이다. 문인이나 예술가처럼 대단한 창작작업을 하는 것도 아닌 터에 사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집 나서면 막상 갈 곳이 없어지니 별 수 없었다.

‘판잣집’ 같은 곳에 컴퓨터, 오디오, 책상, 테이블, 책, 음반이 공간을 차지하면 지나다니기 불편할 때도 있다. 같은 건물에 세 들어 있는 다른 사무실도 비슷한 크기지만 대부분 두세명이 단촐하게 일하고 있다. 가끔은 그들이 “도대체 뭐 하는 곳인가요?”라고 물어온다. 나도 내가 뭐하는 건지 모를 때가 많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하다가도, 왜 꼭 ‘돈되는 일’만 사업이라고 부르는지 투덜거릴 때도 있다. 사무실 문에 ‘웹진 weiv’라고 써붙였더니 ‘인터넷 사업이냐, 벤처기업이냐’라고 물어보는 일도 있었다. 왜 사냐건 웃지요.

따지고보면 취미처럼 시작한 웹진 일을 ‘사업’이라고 부르기로 작정한 데는 뭔가 한다는 ‘텐션’을 주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다. TV 뉴스에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인터넷 얘기를 떠드는 시대라, 막차 타는 심정이 있었지만 일단 벌이고 봤다. ‘아날로그 지면’에 글쓰는 것과는 상이한 경험이 되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거의 넷맹인 처지라서 기획실장이라는 허울좋은 ‘한직’에 머물고 있지만.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공동체’ 비슷한 곳에서 일에 따르는 책임소재를 묻다보니 가끔 불화가 생겼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든 그런 거니 이건 큰 문제는 아니다. 큰 문제는 역시나 돈. 우리 같은 ‘인디’ 웹진 사업이 당장 돈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웹진 사업이 대형 포털사이트(portal site)와 연계되어 진행되는 상황에서 ‘군소’ 웹진의 스폰서를 구하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게다가 굴러가다보면 할 일은 점점 많아지고 흥미는 예전같지 않기 마련이라, 착수한 지 반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벌써 헉헉거리고 있다. 그러다보니 취직할 곳을 알아보는 ‘모럴 해저드’ 현상이 발생해도 백안시하기는커녕 ‘권장’하기까지 했다.

그가 취직한 곳도 요즘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지고 있는 ‘닷컴’자 붙은 포털사이트 중 하나다. 뜻밖에도 웹진에서 편집위원을 지냈던 사실, 한국 인디 록에 관한 서적을 저술했던 사실, 심지어는 PC통신 소모임에서 부시삽을 했던 사실 등이 ‘경력’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착하고 성실한 그가 ‘weiv’든, 신현준이든 팔 수만 있다면 뭐든 팔아서 잘나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물론 이렇게 궁상떠는 시간보다는 능동적 자의식으로 충만한 시간이 더 많다. 취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게 ‘얼터너티브’하다는 자의식 말이다. 취직이든 사업이든 뭐든 주류 사회에 들어가서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면 ‘내가 백번 잘했지’라는 안도감이 든다. ‘돈 없다’는 점이 가끔 불편할 때가 있지만 ‘찢어진 빤쓰 기워 입을 정도는 아닌데 뭐 어때’하면서 때우면 된다. 기분좋은 날은 “나보다 글 열심히 쓰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고 우격다짐으로 밀고 나가기도 한다. 현대의 문화라는 게 ‘여가’의 산물이라면, 그리고 한국 같은 ‘하드 워킹 소사이어티’에서 충분한 여가시간을 확보하기 힘들다면, ‘문화인’은 백수일 수밖에 없다는 황당한 ‘이론’도 나온다. 신용카드 결제일 같이 우울한 날이면 ‘좋은 글은 궁핍할 때 나온다’는 고전적 문학관을 머리에 입력하면 된다. 대부분의 날들이야 새털처럼 가볍게 그리고 유유히 지내는데 뭐가 불만이랴.

하지만 나야 이렇게 사는 게 생활이 되었지만 갈수록 이런 생각이 씨알이 안 먹히는 모양이다. ‘시중 들어줄 후임자’ 한명을 알아봤는데, 그는 “다 좋은데, 나는 돈 없으면 못살아요. 쓸 건 써야 되요”라고 말했다. ‘헝그리 정신’ 운운하면서 대꾸했지만, 웃자고 한 소리였다. 이제 궁상 그만 떨라고? 궁상 칠갑인 영화나 소설은 평만 좋던데… 쩝, 궁상도 아무나 떠는 거 아닌가?

신현준씨의 홈페이지는 http://members.tripod.com/hyunjoon_shin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