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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보고] 선댄스 2000 [1]

디지털, 여성 그리고 아시아의 습격

2002년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스키휴양지답지 않게 눈이 시원스럽게 내리지 않은 채 2000년 벽두의 선댄스영화제를 맞이한 파크시티. 그러나 올해 선댄스에 모인 모두는 폭설을 맞은 듯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디지털 함박눈이 내린 것이다. 애당초 올해 디지털 상영프로그램이 본격화하고 관련행사들도 많이 마련돼 어느 정도 대세의 흐름이 파악되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빠른 속도로 구체화한 것은 다소 의외였다.

이름하여 ‘닷컴딜’(.com DEAL). 바로 인터넷 판권 구매를 일컫는 신조어. 이 새로운 형태의 거래 덕분에 단편영화작가들이 디지털붐의 1차 수혜자로 지목됨에 따라 올해 선댄스에서는 맘껏 기를 펴고 다닐 수 있었고, 단편상영장마다 포진된 각 배급사 관계자들이 서로 탐나는 영화를 선점하려고 영화도 끝나기 전에 부지런히 휴대폰을 들고 다급한 통화를 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선댄스에 디지털 폭설, 단편도 돈이 된다

롭 엡스타인과 제프리 프리드먼

과연 영화제 중반부터 각종 구매소식이 속출했다. 1번 타자로 선댄스 채널에서 영화제에 출품된 단편영화 5편의 방송판권과 인터넷판권을 구매했다는 뉴스는 그 액수에 상관없이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어 인터넷배급 분야의 선두주자들인 아톰필름과 아이필름의 구매소식을 속속들이 공개하기 시작했다. 시애틀에 본사를 둔 단편영화배급전문회사로 99년초부터 공격적인 프로모션을 펼치면서 혜성같이 등장한 아톰필름은 지난해 2천만달러의 투자유치와 성공적인 웹사이트 마케팅, DVD배급개척으로 할리우드마저 놀라게 하더니 올해 들어서는 자리굳히기에 돌입하는 느낌. 선댄스에서도 이들은 단편영화 시사가 가능한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등 기기묘묘한 아이디어로 단편영화계의 맹주임을 과시했고, 덩달아 그동안 찬밥신세였던 단편영화는 언제나 가장 먼저 매진되는 기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새 천년 벽두부터 선댄스를 휩쓴 디지털 열풍에 대해 프로그래머 제프리 길모어는 다소 우려섞인 견해를 제시했다. “명백하게 인터넷은 상거래에 경도되어 있지만, 과연 이 커뮤니티가 대안적인 배급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또다른 다양성과 틈새 커뮤니티로 승화할 수 있을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너무 냉소적인 시각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터넷비즈니스에서 한 가지 인정해야 할 점은 많은 이들이 무조건 콘텐츠 확보에 혈안이 돼 생각없이 아무 콘텐츠이나 수용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긴 하지만 어쨌든 엄청나게 영향력 있는 연합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변화에 안티 선댄스, 유사 댄스들이 뒤질 리가 없다. 이들은 본 영화제에 비해 절대적인 열세를 만회하는 방편으로 디지털 바람에 착안, 발빠른 행보들을 보여주었다.

6회째를 맞아 명실공히 국제영화제 목록에 등재되고 월드시네마섹션까지 소화해내고 있는 슬램댄스는 디지털 영화를 대거 선보였고, 3년차인 노댄스와 슬램덩크 또한 디지털에 가까운 프로그래밍을 구사했으며, 제1회 디지댄스가 출범하기도 했다. 이젠 '댄스'도 하나의 그런저런 유행처럼 돼가는지, 다큐멘터리 전문을 표방한 독댄스(doc Dance), <트로미오와 줄리엣>을 비롯, 황당무계 패러디 B급 영화들을 양산하며 독특한 브랜드를 창출하고 있는 트로마 영화사가 또 한번 뒤통수를 치며 선보인 트로마댄스(Tromadance), 그외에 이름조차 묻혀버린 문댄스, 레인댄스 등도 출현했다.

디지털 열풍에 평론가건 업자건 지나치게 호들갑을 떠는 모양새가 또다른 거품논쟁의 불씨를 남기긴 했지만, 어쨌든 새 천년을 여는 선댄스는 누가 아니랄까 정말 밀레니엄다운 면모를 과시하면서 첫 테이프를 끊은 셈이다.

걸파이팅-여성과 아시안의 인정사정 없는 승전보

‘점유율 40%시대 돌입!’ 선댄스 사전에서 한국영화 자국시장 점유율과의 동의어를 찾아보면, 바로 올해 여성감독 작품의 점유율이 튀어나온다. 점유라기보다는 점거, 아니 한국버전으로 ‘선댄스 습격사건’으로 칭할 만한 올해의 대세를 제프리 길모어는 이렇게 설명한다.

“최근 여성감독들의 작품성향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절충주의다. 과거 여성감독들의 영화는 종종 한정된 구역에 매여 있기도 했지만 이제 그런 경우는 더이상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무슨 요리?>

여성감독의 행진은 영국 <BBC> 기자 출신 구린데 차다 감독의 개막작 <무슨 요리?>를 신호탄으로 시작했다. 이 영화는 다양한 인종의 여성들이 추수감사절날 각자의 음식을 만들며 알게 되는 서로의 문화차이를 아기자기하며 위트있게 그렸다. 이어 제작 전부터 요란했던 매리 해론의 <아메리칸 사이코>가 성공적으로 월드프리미어(세계 첫 시사)를 치렀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신세기 버전을 시도한 듯한 <러브 앤 섹스>의 발레리 브레이만, <러브 앤 바스켓볼>의 지나 프린스, 이미 칸에서 성대한 성년식을 마친 <처녀자살소동>의 소피아 코폴라 등 극영화 경쟁부문 출품작 16편 중 6편의 여자감독 작품들도 누구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을 정도로 각광을 받았다.

거기에다 각 부문 대상을 비롯, 여성감독들에게 많은 상을 안긴 경쟁부문의 수상결과는 21세기 독립영화의 새로운 주연으로 여성과 아시안을 염두에 두기 시작한 선댄스의 마음가짐을 여실히 뒷받침해주었다.

극영화 경쟁부문 대상-<걸파이트><날 믿어도 돼>

심사위원 대상 수상작1 <걸파이트>: 어디선가 들려오는 강한 비트의 빠른 드럼사운드. 벽에 기대어 고개숙인 한 흑인소녀가 점점 화면으로 다가오고 관객은 분노와 독기로 가득 찬 10대의 믿겨지지 않는 강렬함과 마주하게 된다. 엄마는 자살하고 아들에게만 매달리는 아버지 밑에서 따분한 일상을 보내고 학교에선 비뚤어진 공주들에 둘러싸여 왕따를 당하던 16살 다이아나는 어느새 동생 대신 권투도장에 나가기 시작, 여성복서를 꿈꾼다. 여기서 만난 동료와 사랑을 느끼지만 결국 같은 링 위에 오르게 되고, 연인을 때려눕힌다는 이야기. 성장영화의 상투적인 상황설정에도 불구하고 10대 여성의 분노, 성장의 통증이 마치 화면을 뚫고 나오듯 쾌속으로 영화를 이끌어간다.

미국 인디 영화의 맏형 존 세일즈가 제작총지위로 이름을 올리고 직접 단역으로 출연할 때부터 심상치 않았던 이 영화를 만든 카린 구자마는 올해 미국 인디영화의 신데렐라가 될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일본계 출신 여성 감독인 그는 일찌감치 존 세일즈에게 발탁되어 데뷔작이 세상에 알려지기도 전에 이미 '바이오-픽션 스릴러'라 이름 붙여진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날 믿어도 돼>의 케네스 로니건 감독

심사위원 대상 수상작 2, <날 믿어도 돼>: 공동수상으로 낙착된 올해 대상선정의 뒷이야기 중에는 작품성 대결 외에 다른 배경도 작용했으리라는 추측이 난무했던 게 사실이다. 바로 두 작품 뒤를 받치고 있는 두 거장 감독들의 크레딧 덕분이다. 이미 <애널라이즈 디스>의 각본으로 할리우드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케네스 로니건의 데뷔작인 이 영화의 제작총지휘 크레딧에는 마틴 스콜세지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마틴 스콜세지의 후진양성은 이미 <그레이스 오브 마이 하트>의 앨리슨 앤더슨에서부터 그 빛을 발했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함께 자란 두 남매가 어른이 되어 서로 다른 삶을 살다가 맞닥뜨리면서 겪게 되는 갈등과 화해를 섬세한 대사와 미묘한 감정선을 통해 편안하게 끌고 나가는 이 영화에서 감독은 단순한 플롯에서 다양한 재미를 끌어내는 특출한 재능을 뽐내고 있다.

“타란티노 지망생들이 만든 것 같은 작품은 줄어들고 플롯과 내러티브를 갖춘 뭔가 다른 21세기형 영화들이 소개되고 있다”며 제프리 길모어는 올해 경쟁부문 영화들의 경향을 이렇게 압축했다.

<척 앤 벅>은 전세계를 웹마케팅 열풍에 몰아넣으며 단숨에 중견 배급사로 자리매김한 <블레어 윗치>의 명가 아티잔에서 일찌감치 도장을 찍은 작품임이 알려지면서 영화제 초반부터 화제를 모은 작품. 경쟁부문에서 소재에 있어서 눈길을 확 잡아챈 작품은 팀 디즈니의 <Blessed Art Thou>. 사제가 여자가 되고 성경에서와 같이 잉태하는 등의 발칙한 상상력이 관객을 휘어잡았다. <커미티드>(Committed), <변두리의 범죄와 응징>(Crime and Punishment In Suburbia), <다른 목소리>는 거의 주류영화와의 경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팽팽한 연출력과 장르화를 대변하는 작품들. <커미티드>의 헤더 그레이엄, <변두리의 범죄와 응징>에서 앨런 바킨, <다른 목소리>에서 캠벨 스콧과 롭 모로 등의 호연은 미국의 이른바 주류배우들이 독립영화에서 차지하는 위치, 그리고 서로의 시너지 효과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를 간직한 여피족 게이의 섬뜩한 복수극을 그린 <얼바니아>는 상대적으로 희귀해진 퀴어계열의 스릴러인데, 선댄스의 정통 브랜드 퀴어 영화들은 이제 자체 세포증식을 종결하고 주류영화와의 완전한 결합에 몰두하기 시작한 듯하다.

다큐멘터리 경쟁부문-한국입양아 감독 주목

<퍼스트 퍼슨 프루어럴>

한편,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빈축에도 아랑곳않고 꿋꿋하게 전통의 선댄스 품질을 지켜온 데 일조했던 다큐멘터리 경쟁부문에서는 올해에도 풍성한 결실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올해는 유난히 인종, 민족관련 휴먼 다큐멘터리가 많았고 그 중 많은 관심을 끌었던 작품의 하나가 바로 한국입양아 감독 딘 보르셰이 림(한국명 강옥자)의 <First Person Plural>.

한국전 직후, 미국의 가정으로 입양되었던 감독 자신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나가다가 발견하게 된 또다른 비밀, 자기가 알고 있던 자신의 한국이름 외에 또다른 이름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겪는 충격과 갈등들이 진솔하게 담겨 있는 다큐멘터리. 특히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입양을 한 가족과 입양보낸 가족간의 심리를 여러 각도로 그려낸 부분에선, 자신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면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감독의 역량과 용기가 돋보였다.

대상을 수상한 <낮으로의 긴 밤여로> 역시 두 여성감독의 오랜 시간에 걸친 공동작업.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문제를 차근차근 짚어가면서 남아프리카의 풍경과 어우러져 진한 감동을 자아낸다는 평을 들었다.

게이 다큐멘터리의 고전으로 꼽히는 <셀룰로이드 클로젯>을 만들었던 롭 엡스타인과 제프리 프리드먼의 신작 <175조>는 나치하 또다른 홀로코스트의 희생양으로 동성애자 집단을 집중조명한 작품으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며 감독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