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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석의 씨네콜라주] 노땡큐 탈출

“사람 살려. 사람 살려요.” 고립무원 무인도에서 외롭지만 꿋꿋이 살아온 팀 로빈슨 크루소. 무인도 생활 7주년을 기념한 자축 파티를 벌이던 중, 모닥불의 불티가 야자수에 옮겨 붙으면서 섬 전체를 태워버릴 만큼의 엄청난 화재를 일으키고 만다. 불을 피해 바닷가로 도망 나온 로빈슨은 때마침 이 불기둥을 보고 찾아온 선박에 의해 구조를 받게 된다. 허겁지겁 배에 오르기는 했지만, 멀리 사라져 가는 붉은 섬을 바라보는 로빈슨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그동안 살고 있던 이층집은 물론이고, 힘겹게 가꾸어놓은 논과 밭도 송두리째 날아가버렸다. 품종 개량으로 일곱 가지 맛을 내는 야자수도 이제 생산 단계에 이르렀는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벽 위에 설치한 전용 번지 점프대는 어떻게 하나?

“그래 그 섬에서 혼자 살았다고?” 뱃사람들에 이끌려 선실로 내려간 로빈슨은 외눈박이에 외다리에 갈고리 손을 가진 선장을 만나게 된다. “네, 육지에서 살았는데. 집 사서 대출금 갚고 나니까 마누라가 이혼하자고 해서 위자료로 다 날려버렸죠. 그래서 배를 탔다가….” 선장은 갈고리 손을 내저었다. “좋아. 여기선 외롭지 않을 거네.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으니.” 로빈슨은 뱃사람들에 이끌려 선실 아래로 내려갔다. 손과 발에 쇠고랑을 찬 사내들이 노래를 부르며 노를 젓고 있었다. “망자의 관 위엔 열다섯 사람, 얼씨구 좋다. 럼주를 마시자.”

다시 해적선에서 갖은 고생을 한 로빈슨은 몇년 뒤 수석 주방장의 자리에 올라선다. 무인도에서 살면서 어떤 재료든 훌륭한 음식으로 만들어내는 비법을 터득한 덕분이었다. 후크 선장은 그의 솜씨를 썩히기 아깝다며, 벤처 투자를 받아 ‘후크스’라는 해상 패밀리 레스토랑 사업을 벌이게 된다. 로빈슨은 연봉은 많지 않았지만 스톡옵션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주식을 팔아 독립할 계획까지 짜두었다. 생선 튀김 전문 레스토랑으로, 무인도에서 큰 도움을 주었던 노예 프라이데이를 생각하며 ‘T-GIM 프라이데이’라는 이름까지 작명해 두었다. 그러나 ‘후크스’가 코스닥에 등록되던 날, 후크의 해적선이 어떤 선박과 부딪쳐 좌초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가 해적선에 잡혀온 지 꼭 7년이 되던 날이었다.

“그런데 그때 부닥쳤던 것이 죄수 호송선이고, 해상 경찰대가 자네까지 그 죄수들과 섞어서 이곳 알카트로즈 섬으로 데리고 왔단 말이지.” 로빈슨은 체스를 두다가 놀라서 앞자리의 상대를 쳐다보았다. 흰 머리의 노인은 엷게 웃음을 띠고 있었다. “뭘 봐? 자네가 그렇게 허풍떠는 거, 여기 죄수들은 다 알고 있는데.” 로빈슨은 고개를 숙이고 그 못지 않은 멋진 미소를 지었다. “못 믿으시겠다면 할 수 없지요. 자, 장군이요.” 박수가 터져나왔다. 로빈슨이 알카트로즈배 체스 대회에서 우승하는 순간이었다.

다음날 로빈슨은 웃음을 가득 띠고 간수장실을 나오고 있었다. 인터넷 체스 선수권 대회에서 그의 출전을 요청해왔다는 것이다. 간수장은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만 하면 특별 사면까지도 요청해보겠다고 호언했다. “그래 그렇지. 내가 지난 7년 동안 얼마나 모범적으로 생활을 해왔는데. 7년… 아, 7년이란 말이지.” 로빈슨은 갑자기 불길한 그림자가 머리 속으로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서버리고 말았다. 그때, 체스 선수권의 결승 상대자였던 노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축하하네. 내 방에 가서 차나 같이 하지.” 로빈슨은 불안을 떨쳐버리려, 그의 뒤를 따라갔다. “어르신께서는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아 나, 빠삐용이라고들 하지.” “빠삐용, 혹시 그 전설의 탈옥수 말씀이십니까?” “아니야. ‘빠삐용’은 불어로 나비라는 뜻이지. 그냥 내가 나비를 좋아해서 붙여진 별명이지.” 과연 그의 방에는 나비가, 할리우드의 노란 나비라고 불리는 이승희의 포스터가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아 이 나비 말이군요.” 로빈슨은 이승희의 가슴에 손을 갖다댔다. 머리 속으로는 그 포동포동한 촉감을 상상하며…. 그러나 그가 짚은 것은 빈 허공이었다. 포스터 뒤로 뚫린 빠삐용의 탈출구 속으로 빨려들어간 로빈슨. 그의 새로운 7년이 시작되었다.

등장인물

팀 로빈슨 크루소: 전설적인 뱃사람 로빈슨 크루소의 자손. 재수 없는 7년 수에 걸려 안정된 인생을 그르치고 있다.

후크 선장: 한때 ‘피터팬’에게 혼쭐이 났던 해적 선장. 이제 새 시대에 맞는 사업가로 변신을 서두르고 있다.

빠삐용: 아랫배에 나비 문신을 한 탈옥의 명수. 그러나 이번엔 로빈슨 때문에 낭패를 겪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