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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너츠>의 만화가 찰스 슐츠 은퇴
박은영 2000-02-01

사진첩으로 가는 스누피

“사랑하는 친구들, 그동안 찰리 브라운과 그 친구들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연재만화 <피너츠>의 마지막회에서 작가 찰스 슐츠는 이런 인사를 전했다. 지난 50년간 75개국의 2600여 신문, 뮤지컬과 TV 영화, 장편 영화와 테마파크에서 만났던 <피너츠>와 이제 이별이다. 슐츠가 은퇴를 발표하자마자 담당 출판사는 74년으로 거슬러올라가 재연재를 시작하겠다고 밝혔으니, 그렇게 옛 사진첩을 들춰보며 추억에 잠길 수는 있겠다. 하지만 팬들은 아직 풀지 못한 호기심과 아쉬움과 바람을 모두 접어야 한다. 소설가를 지망하는 스누피는 꿈에도 그리던 걸작을 내놓을 수 있을지, 순둥이 찰리 브라운의 빨강머리 소녀에 대한 짝사랑은 이뤄질 것인지, 말괄량이 루시는 언제쯤 찰리의 풋볼을 제대로 도울 것인지, 꼬마 피아니스트 슈레더는 루시의 구애를 받아들일 것인지, 고지식한 마시와 터프한 페퍼민트 패티는 어째서 단짝인지, 담요 소년 라이너스는 대체 어떤 유아기를 보냈는지, 각자 상상력과 추리력을 동원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다.

77살 노장 애니메이터 찰스 슐츠가 은퇴 의사를 밝힌 것은 지난해 연말이었다. 몇년째 파킨슨씨병을 앓아온 그는 잇단 쇼크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지난해 말 결장암 진단까지 받았다. 수술 뒤 상태는 호전됐으나 마감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치료를 받고 싶다며, 1월3일치를 끝으로 은퇴했다. 그는 “인생이란 매일밤 밤자리에 들며, 내일은 더 좋은 하루가 되길 바라는 것”이라는 <피너츠>의 메시지를 따라, “내일을 위해”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단일 시리즈를 50년동안 연재한 기록도 그렇거니와, 배경 그림과 캐릭터 디자인을 맡길 문하생이나 스토리 구상을 함께 할 파트너 하나 없이 그 세월을 원맨 시스템으로 버텨왔다는 사실로, 그는 이미 만화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됐다. 프랑스 정부는 그런 그에게 지난 90년 예술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뉴스위크>에 따르면, 찰리 브라운의 모델은 찰스 슐츠 그 자신이다. ‘기꺼이’ 멍청이 또는 패자로 불리는 찰리 브라운처럼, 그 자신도 “아주 형편없지만, 미움 받지 않은 아이”였다고 회고한다. 그에겐 실제로 승리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아파했던 크고 작은 기억들이 있다. 극장에서 선착순 100명에게 초콜릿 선물을 나눠줄 때 101번째였고, 지도 교사의 추천을 받은 그림은 교지에 못 실렸고, 17살에 예술학교에 진학하자마자 2차대전을 맞아 학업을 중단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빨강머리 소녀와 사랑에 빠졌지만, 여자 부모의 극렬한 반대로 헤어지고 말았다. 찰리 브라운이 ‘메아리 없는 사랑’을 보내는 대상이 빨강머리 소녀인 것도 우연한 설정은 아니다. 찰스 슐츠는 자신의 삶에서 연유한 감상적이고 우울한 정조를 거둬내진 못했지만, 독실한 크리스천답게 <피너츠>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밝은 기운을 불어넣었다.

찰스 슐츠는 <피너츠> 캐릭터들에 베이비붐 세대의 특성을 담았고, 60년대 말에는 편집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흑인 캐릭터 프랭클린을 탄생시켰다. 작품에 등장하는 소품도 스누피의 구식 타자기에서 우드스탁의 휴대폰 등으로 시대를 탔다. 변한 것이 많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내일은 분명 오늘보다 나은 날이 될 것”이라는 한결같은 희망의 메시지가 그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은 등만 보이고 있고, 뭐 하나 이룬 게 없는 오늘이지만, 그러기에 더욱 내일을 기약해야 한다는, 그의 낙관주의는 전세계 독자들을 전염시켰다. <피너츠>가 “성인 세계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동시(움베르토 에코)”로 오래도록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찰스 슐츠가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열어둔 시선에서 한순간도 온기를 거두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