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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감독, 현상하면서 <장화홍련전> 찍었어”
2001-07-25

이영일이 만난 한국영화의 선각자들 3 - 이필우 (1)

+ 열여덟에 일본으로 건너가 촬영과 현상기술 익혀, 한밤 촬영소에서 도둑실습도

이필우(1897∼1978)는 최초의 한국인 촬영기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촬영·녹음·현상·편집에 두루 걸쳐 있는 그의 이력에서도 살필 수 있는 것처럼 개척기 한국영화사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공헌자이다.

열여섯살부터 우미관에서 영사기술을 익혔고, 열여덟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사카(小阪) 촬영소에서 촬영과 현상기술을 연구했다. 영화산업의 기초가 세워지고 있던 일본에서 닛카쓰(日活), 쇼치쿠(松竹)의 신인기사로 활동했다. 귀국 직후인 1924년에 제작한 <장화홍련전>은 감독만 한국인이었던 <월하의 맹서>(1923)와 달리 기술의 모든 부분을 한국인의 손으로 해결한 최초의 극영화가 되었다. <멍텅구리> <낙원을 찾는 무리들> <종소리>로 이어지는 작품활동중 총독부의 검열로 몇편의 영화를 잃어버린 뒤 상하이로 떠나 국제적 규모의 제작사이던 ‘대중화백합영편공사’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국내로 다시 돌아와 경성촬영소 기술책임자로 자리하면서 일본 기술진과 합동으로 발성영화에 도전해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1935)을 실현했다. 동생 이명우를 비롯한 국내파 기술진들을 양성한 것도 이필우의 중요한 공로다. 해방 뒤에는 ‘조선영화건설본부’에서 뉴스영화들을 제작하며 기술의 명맥을 이었고, 그의 지휘 아래 정비된 안양촬영소(1957년 설립)는 1950∼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의 토대를 이루었다.

‘한국영화 기술의 개척자’라는 이영일의 평가처럼 많은 순간 ‘처음’이어야 했던 이필우를 기점으로 한국영화의 전 시대를 아우르는 기술사의 방대한 계보가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일곱살 때 부친이 작고하셨다. ‘이필우 시계포’라고 이름붙인 시계포를 남겨주셨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곳에 RCA빅터와 사진기계가 들어왔다. 그중에는 환등기계와 활동사진기계도 있었고 그래서 저녁이면 동생(이명우. 훗날 형을 따라 촬영기사가 된다.- 필자)과 둘이서 환등기를 비춰보고 영화도 돌려보았다. 영화는 한 이십자 되는 건데, 제목은 알 수가 없고 물에 풍덩 빠졌다가 구하러 들어가면 끝나버리는 그런 것이었다. 그걸 비추다가 동경을 키운 것이 계기가 되어 후에 원각사 영사실에 지원하게 됐다.

어머님 말씀하시기로 그 극장의 일을 들으니 민충정공(민영환·구한말의 문신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자결했다. 1959년 <한말풍운과 민충정공>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필자)이 러시아에 대사로 가셨을 적에 보니 나라마다 극장이 있는데 우리나라에만 극장이 없어 되겠느냐, 무슨 좋은 일이 있든지 외국에서 손님이 오든지 극장이 있어야 되겠다 그래서 그걸 지은 거라고 한다.

무대에 올리는 내용은 기생들 춤이 대부분이었지만 다 끝난 뒤에 영화를 비추었다. 미국영화도 있었고 불란서영화로는 빠데(파테), 영국 것으로는 고몽영화(고몽은 프랑스영화사지만 이필우는 영국영화사로 기억하고 있었다)가 많았다. 지금도 생각나는 스토리로는, 도둑놈이 자전거를 주어 타고 도망을 치는데 그러다 굴뚝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얼굴이 새까매져 있고, 아들어간 순경도 깜둥이가 돼 나오는 오락영화다. 똑같이 불란서에서 만든 것이지만 <나비춤> 같은 것은 천연색으로 화면이 좋았다. 그때 천연색이라고 하면 옵셋으로 색을 입히는 채색영화다. 이것이 잘못하면 노랑이가 옆으로 번지거나 하게 되어 있었지만 일절 번짐이 없는 것이 불란서의 전매특허라고 했다. 그런 사진이 많이 들어왔다.

일본땅, 영국기사들 틈에서 익힌 기술

원각사 영사실에서 기술을 배우며 있는데, 내 손으로 영화를 틀 기회가 왔다. 김홍식이라고 YMCA에 철공과 강사로 있던 죽마고우가 영화를 한다고 해서 가보니, <쿼바디스>를 트는데 그이가 직접 필름을 돌리고 있었다. “나 좀 해봅시다”, 그래서 그걸 내가 틀었다. 그것이 열네살 나던 해이고 대정(大正) 2년(1913년- 필자)에는 우미관에 기사 조수로 들어갔다. 한 일년쯤 있는데, 이것 안 되겠다, 이왕 배울 거면 활동사진 촬영을 배워야지 하는 생각이 나고 또 안창남(한국 최초의 비행사. 1949년 노필 감독이 육군항공대의 후원을 받아 제작한 영화 <안창남 비행사>의 주인공- 필자)이가 “나는 비행기를 배우러 갈 텐데 넌 뭘 허느냐, 그런 짓말고 일본에 들어가 공부를 해라” 한 것이 자극이 되어 6전50원을 들고 일본에 들어갔다.

오사카에 가서 제일 처음 제국키네마 계통의 영화관을 찾아갔다. 그저 짧은 일본말로 소개를 하니, 아메(雨)상, 아메(雨)상 나를 그렇게 불렀다. “너 이런 걸 오래 배우겠느냐”고 하길래 무조건 그러겠노라고 했다. 한달을 보내고 나니 궁굼해 죽겠어서 촬영소 구경을 좀 시켜달라고 했다.

고사카촬영소에 가보니 촬영, 조명기사가 전부 영국사람이었다. 영사기사 주임 밑에 같이 있던 친구 세명하고 나하고 넷이서 영국기사들 틈에서 연구를 하자고 다짐을 놓았다. 밤중에는 뭘 하느냐 하면 낮에 그 사람들이 하는 걸 봐두었다가 발가벗고 들어가서 넌 현상해라, 넌 그림(촬영된 필름을 지칭하는 듯.- 필자) 닦아라, 난 촬영해야겠구나 했다. 그러니까 어깨 너머로 배우고 도둑으로 익힌 셈이다.

그때 촬영이라는 것은 무대극을 그냥 찍어서 갖다 비추는 격이었다. 무대 앞에 촬영기를 갖다놓고서는 내돌리는 건데, 한 백자 들어가 있는 필름이 탁 끊어지면 무대도 카메라도 정지한다. 그래서 필름 체인지를 하고 또 촬영을 하는데 깜짝이라도 하게 되면 못 쓰게 된다고 해서 카메라가 절대 움직이질 않는다. 기술에 익숙해지고 나자 영국놈을 아내고 우리끼리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대사 하나 모르고 극도 모르는 놈이 무슨 촬영이냐 말이지.

그 무렵에 일본사람들로서도 촬영기사가 뚜렷이 없었고, 이 틈에 내가 신인이었다. 후에 일본도 파라마운트에 있던 헨리 고다니(할리우드 출신의 연출가. 닛카쓰에 이어 1920년 문을 연 쇼치쿠는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도 있던 일본 영화인들을 불러들였다.- 필자)가 와서 쇼치쿠 영화를 만들었고 그때부터 신파 껍데기를 벗기려고 애들을 쓰면서 극영화가 새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고생스러운 일은 고다니가 미국에서 라이트를 하나 가져왔는데, 촬영 잘 못하면 하루종일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어찌나 큰지 3킬로 반이나 되는 것이 카봉에서 나오는 납 때문에 눈을 못 떴다. 나중에 듣기로 미국에서도 잘 안 쓰는 기계라고 했다. 그래 고생을 하다가 한국에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쇼치쿠에서 친구들 하는 말이 “빈손으로 나가면 뭘 허느냐, 뭐 하나라도 도둑질해가 돈을 벌어야지”, 권하여서 가지고 나온 것이 <동도>(東道)다(그리피스의 1920년도 작품. 원제는 - 필자). 도둑질이라는 것은 복사하는 거다. 일본도 문화재 등록법(저작권법)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사람들이 들고 들어오는 레코드판도 막 복사하고 그럴 때였다.

<동도>의 흥행으로 가능성확인

막상 서울에 왔으나 어디고 극장문을 쉽게 들어가게 하질 않았다. 아오키라고, <매일신보>에 기자로 있는 친구한테 신세를 크게 지고 대정관과 얘기가 됐다. 이놈이 어떻게 찾았는지 일본에서 나온 <동도> 평을 찾아내어 신문에 내주었다. 극장은 되었고, 비행사 이기연한테 부탁을 해서 그때 돈으로 750원을 내고 비행기로 전단을 뿌렸다. 딱 개막을 하는데 낮에는 극장이 반 이상 부러지고 굉장했다.

<동도>의 흥행을 보고, 한국에서 사진(영화를 지칭- 필자) 하나 만들 생각으로 있는데 우미관 시절 우리 영사기사 선생인 박정현씨를 만났다. 그때는 이미 단성사의 지배인으로 있었는데 밑천을 대줄 테니 영화 하나 박자고 제안을 해왔다. “박읍시다” 대답은 해놓고, 박기는 박아야 되겠는데 막막했다. 라이트 하나 들 사람이 있나, 메이크업 할 사람이 있나, 감독은 누가 하나, 현상, 프린트 다 혼자 해야 될 테니. 그러나 한국서 안 될 일 있느냐 해서 단성사 변사실에 촬영부를 만들어가지고 시작했다. 감독은 이구영이 시키자(이때의 연출이 김영환이라는 기록도 있고, 명목상 박정현을 감독 자리에 두었다는 기록도 있다.- 필자), 시나리오는 누가 쓰느냐, 김영환(각본·감독·작곡가로도 활동한 변사. 나운규 감독 <풍운아>의 해설로 유명하다.- 필자)이라는 이가 연극을 했다고 하니 시나리오를 쓰게 하자 궁리가 많았다. 그래서 후에 <장화홍련전>이 나왔다. 그 스토리는 소설과 같다. 그때는 우리가 어렸을 때 소설을 봤던 그 식으로 해야지 조금이라도 새 맛을 들이면 손님이 들지 않는다. 나중에 홍성기가 <춘향전>(1961년작- 필자)에서 실패한 원인이 거기에 있다.

각본은 다 되어 나왔고 배우가 문제였는데, 딸 형제 둘은 박승필(단성사 관주를 지낸 영화제작자- 필자)씨가 경영하던 광무대에서 데려다 쓰고, 원님은 우정식이가 하고, 아버지는 단성사에서 표 팔던 이를 시켰다. 처음에는 엉망이었다. 메이크업을 해놓아 봐야, 하고 나면 흐르고 하고 나면 흐르고, 할 수 없어 분을 바르는데 빛깔이 핑크빛이 돼버렸다. 액션을 누가 봐주는 사람도 없고, 조감독이 있나 촬영조수가 있나 현상을 할래도 혼자 다했고, 그래 절간 방 하나를 빌려서 딸 둘이 앉아 구박을 받는 것부터 박기 시작해 삼복중에 3주일 걸려 완성했다.

정리 이기림/ 동국대 영화과 석사과정이영일 프로젝트 연구원 marie32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