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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은유도, 정신병자의 심상사례도 아닌 <파이트 클럽>

세 가지 각도에서 한번 접근해보자. 데이비드 핀처의 신작 <파이트 클럽>은 무뇌아적인 우수마발은 아니다. 그렇다고 기존을 훌쩍 뛰어넘는 걸작도 아니다. (척 팔라닉의 도발적인 데뷔작을 꽤 충실히 재현한) 이 위악적이리만치 쾌활한 풍자극은, 도발이라는 측면에 관한 한, 지극히 재미있고, 놀랄 만큼 연기가 뛰어나고, 기획 또한 대담하다. 적어도 강철에 크롬 도금을 입힌 것 같은 그 외양이 달걀찜 거죽처럼 갈라져나갈 때까지는.

마천루는 마천루를, 총은 그저 총을 뜻할 뿐인 때도 가끔 있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남근주의로 떡칠갑한 억압적 장치들 속에서 펼쳐지는 영화 <파이트 클럽>은 일련의 심리적 사정행위를 목표로 삼는다. 내레이터를 겸하는 이름없는 주인공 에드워드 노튼은 입에 총구를 문 모습으로 처음 소개된다. 이후, 영화는 이 순응주의적 무산자가 왜, 그리고 어떻게 그의 테스토스테론(남성 호르몬) 수위에 불을 지피며, 왜 그리고 어떻게 원시적인 패거리들과의 육탄전을 통해 그의 내면에 숨은 남성성을 해방시키는지를 시시콜콜 회상한다. 그러는 한편으로, 핀처는 불가능하리만큼 매끈한, 다시 말해서 디지털 기술에 의지한 일련의 카메라워크로, 그 분야에 관한 한 도사임을 다시금 뽐낸다.

<파이트 클럽>은 작가 J.G.발라드(<태양의 제국> <크래쉬> 등의 원작자. ‘귀류법의 왜곡된 전도’, 즉 모순된 논리적 전개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거짓이 아닌 진실을 드러내는 작품세계로 유명하다.-옮긴이)가 창조해낸 무미건조한 근미래적 환경 속에서 전개된다. 대기업의 ‘리콜 심사관’이라는 주인공의 직업에서도 발라드의 흔적이 느껴진다. 노튼은 그 직업 때문에 사고 자동차들을 조사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미국 전역을 날아다니며, 그 과정에서 비행기의 공중충돌 공포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다. 핀처가 <쎄븐>에서 이미 그려보인 바 있는 것과 비슷한 분위기의 도시 꼭대기에서 이케아 가구회사의 카탈로그 속에 파묻혀 사는 이 신경증적 불면증 환자는, 환자들의 자구모임들을 순례하며 밤시간을 때운다. 그중에서도 그가 선호하는 쪽은, 물론 고환암 남성들을 위한 모임. 거기서 그는 호르몬 때문에 망가진 전직 레슬러(미트 로프)와 눈물젖은 관계를, 여성인 또다른 ‘자구모임 순례자’와는 좀더 애증이 엇갈리는 관계를 맺게 된다.

시커먼 눈화장을 하고 줄담배를 피워대면서, 서랍에 딜도(여성 자위기구)가 들어 있는 돼지우리에서 사는 야만적 미인, 말라(헬레나 본햄 카터가 연극 <Wings of the Dove>에서보다 한층 더 밀도있는 연기를 선보인다)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여성이다. <파이트 클럽>은 사나이들의 극단적인 밤외출 얘기다. 주인공의 삶은 비행기에서 우연히 타일러 더든의 옆좌석에 앉는 순간부터 180도 달라진다. 빨간 가죽재킷과 격자무늬 셔츠, 체크무늬 바지를 입은 이 날티나는 무법자적 인물을 연기한 브래드 피트는, <12몽키즈>에서 이미 과시했듯이, 극도로 카리스마적인 미치광이 연기가 되는 배우다. 콘도가 폭발해 버리자, 주인공은 예측불허의 새 이상형 대체자아의 집으로 들어가고, 이후 두 사내는 도시의 유독성 산업쓰레기 야적장의 자연스러운 풍화물처럼 보이는 습기차고 낡아빠진 빅토리아식 저택에 함께 살게 된다.

영사기사라는 타일러의 야릇한 직업에도 나름대로의 뜻이 있기는 하지만, 노튼은 맨주먹 폭력에 대한 이 친구의 무분별한 취향에 훨씬 더 매료된다. 머지않아 두 사내는 인근 주점의 주차장에서 야밤의 주먹대결을 벌임으로써, 스스로 구경거리가 된다. 넘쳐 흐르는 재기와 도발적이리만치 쇠락한 장면의 미장센으로 봐서, <파이트 클럽>은 <브라질>(테리 길리엄 감독의 근미래영화. 국내에서는 <여인의 음모>라는 제목으로 비디오 출시됐다.-옮긴이)의 변주곡이라 할 만하다. 주인공은 밤이면 웃통 벗고 주먹을 휘둘러 대고, 다음날 아침에는 깨지고 멍든 얼굴을 자랑스럽게 쳐들고 출근한다. 그러다간 이윽고 말라와 타일러가 서로 얼킨다. “저 여잔 내 자구모임에 쳐들어 오더니, 이번엔 내 집에까지 쳐들어왔어”라고 노튼은 투덜거린다(주인공의 분열적 정신상태를 암시하는 이 ‘동침 뒷날 아침’의 불평은, 타일러로 하여금 다시 부모집에 들어가 사는 것 같다고 짜증내게 만든다).

싸우는 재미와 멍든 상처에 대한 그 온갖 사도마조히즘적인 찬양에도 불구하고, <파이트 클럽>의 결론은 주로 형이상학적이다. 주인공과 타일러는 화장비누를 만들기 위해 지방흡입술 시술병원에서 지방을 훔친다(“우린 돈많은 여편네들한테 지네들 궁둥이 비곗살을 되파는 셈이야”). 타일러의 이런 헤비메탈적 실존주의가 추종자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하는 건 불가피한 수순. 머지않아, 그는 기괴한 ‘램로드 클럽’ 지하실에서 주먹질 모임을 이끌면서 그 동네 멍청이들의 정신을 빼놓을 뿐만 아니라, 한층 더 야심적인 반사회적 농담들을 뱉어내기 시작한다. 차를 박살내고, 진열창을 폭파시키고, 세븐 일레븐의 점원들을 겁주는 따위의.

결국, <파이트 클럽>은 타일러의 전위적인 비전을 은밀히 조직화하는 내용까지 극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고, 의상으로 대변되는 파시즘 비판극으로 전환하면서, 망각의 운명을 향해 일직선으로 치닫는다. 지난 겨울 개봉됐다가 거의 묵살당한 독립영화 <Six Ways to Sunday>와 같은 플롯의 반전이 있음직하건만, 영화의 마지막 한 시간은 지겹다 소리가 절로 나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특수효과가 만들어낸 묵시록인 마지막 장면의 허세만만한 허무주의는 기다린 보답이 있는 클라이맥스였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사회적 은유인가 아니면 한 정신병자의 임상사례인가? <파이트 클럽>을 흔히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크래쉬>와 견주곤 하지만, 이 영화의 태도는 좀더 감상적이고, 덜 예리하다. 도무지 ‘탁월함’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파이트 클럽>은 고뇌하는 남성 캐릭터들의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강조한다. “우린 여자들이 키운 남자들의 세대야… 우린 신의 실수로 태어난 아이들이야” 하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아버지와 싸울 힘이 없는 그들은, 서로를 두들겨팬다. 이 영화의 핵심적인 장면에서, 주인공은 사장에게 대들면서 피곤죽이 될 때까지 스스로를 폭행한다. 이 자작 폭력극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파이트 클럽>은 니체철학이 말하는 권력의지마저 농담으로 만들어 버린다. 여기, 텔레비전 낮방송 제작자들에게 던지는 질문 하나. ‘아빠’ 없는 세상에서 ‘오이디푸스’를 연기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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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은 뉴욕의 문화주간지 <빌리지 보이스>의 짐 호버먼 칼럼을 독점전재합니다. 이 글은 <파이트 클럽>에 대한 99년 10월20일치 평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