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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영원한 제국은 없다

고대 중국의 영웅 범려가 두 번째 부를 일궜을 때 둘째 아들이 체포됐다. 초나라에서 사람을 죽인 것이다. 범려는 막내인 셋째 아들에게 거금의 구명금을 맡겨 초나라로 보내려 했다. 그러자 사실상 집안일을 도맡아 해온 큰아들이 그런 중대사를 자기에게 맡기지 않는다며 반발한다. 절망한 끝에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까지 한다. 부인까지 나서 부추기자 범려는 어쩔 수 없이 장남을 보낸다. 그리고 이렇게 신신당부한다.

“가서 장생이라는 사람을 만나라. 그분에게 황금을 모두 맡기고 그분 말대로 해라. 일체 간섭하지도 말고 쓸데없는 일도 하지 말아라.”

큰아들은 처음에는 아버지 말대로 했다. 장생이 말했다.

“빨리 이곳을 떠나시오. 절대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동생이 풀려나더라도 그 경위는 묻지 말고….”

큰아들은 그러나 초나라 수도로 들어가 별도로 권세가들을 상대로 석방운동을 펴기 시작했다. 장생은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왕과 공자들로부터 스승으로 존경받으면서도 청빈하게 살고 있었다. 따라서 구명운동이 성공하면 그대로 그 황금도 돌려줄 참이었다. 그는 초나라 왕을 만나 천문에 관해 논하면서 말한다.

“어느 별이 어디에 머물고 있으니 이것은 우리 나라에 좋지 않은 징조입니다. 왕께서 덕을 베푸시면 그 해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왕은 그의 말대로 대사령(大赦令)을 내리기 위해 먼저 창고봉쇄령부터 내렸다. 대사면을 예상하고 도둑질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범려의 큰아들도 창고봉쇄령 소식을 듣고 곧 대사령이 있을 것을 알게 됐다. 그러자 장생에게 맡긴 황금이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큰아들은 범려가 월나라 재상의 자리를 버리고 제나라 해안지방에서 농사를 짓던 어려운 시절에 태어났다. 돈을 벌기가 얼마나 힘들고 돈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았다. 장생을 찾아가 대사령으로 동생이 석방되게 돼 인사차 왔다고 하면서 눈치를 줬다. 장생은 불쾌했다. 풋내기한테 부끄러움을 당한 것이다. 돈을 그대로 가져가라고 한 그는 다시 왕을 찾아간다.

“들리는 소문에 왕의 측근이 범려로부터 뇌물을 받아 그의 차남을 석방하려고 대사령을 내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국 초나라 왕은 차남에 대한 사형을 집형한 뒤 그 이튿날 대사령을 내려버린다. 큰아들은 살아 있는 동생 대신 유해만을 가지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범려는 멸망의 나락에 빠진 월나라 왕 구천을 도와 재기시킨 명참모이자 명재상이다. 그는 또한 부를 일구는 데도 발군의 능력을 발휘했다. 재상의 자리를 떠나온 뒤 두 차례에 걸쳐 큰 부를 일궈 중국 역사상 대부호를 상징하는 ‘도주’(陶朱: 도 땅의 주씨, 곧 범려가 도라는 지역에서 주씨라는 성을 쓰며 거금을 일군 것을 표현하는 말)라는 용어가 생겨나게 한 바로 그 주인공이다. 나아가 그는 그렇게 일군 권력과 부 그리고 명예를 관리하는 데도 대단히 뛰어났다. 구천이 춘추오패로 꼽힐 정도로 대성공을 거둔 뒤 정작 범려는 재상의 자리를 버리고 도망친다. “큰 이름이 난 채 오래도록 머물면 좋지 않다.” 범려와 달리 관직을 제때 버리지 못한 대신 문종은 강요 속에서 자결해야 했다. 범려는 재물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나눠줄 줄도 알았다. 또한 원한을 사지 않고 선덕을 쌓으려 노력했다. 재상직을 그만둘 때라든가 제나라에서 큰 부를 일군 뒤 떠날 때에도 숱한 재물을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줬다. 그렇게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그도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게 바로 자식이다. 큰아들은 그토록 아버지가 일렀는데도 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가지 않는가? 둘째는 그런 아비 아래서도 사람을 죽이고 말지 않는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막내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전하는 뉴스를 보며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하늘은 누구에게도 모든 것을 다 허락하지는 않는다. 세상의 명예, 권력, 부는 물론 이런 모든 것을 상속까지 할 수 있는 명가문 영국 왕실도 모든 자녀가 이혼하고 끝내 그 맏며느리가 비운의 죽음마저 겪는 걸 벗어날 수 없었지 않는가?

삼성 가문의 갑작스런 불행을 계기로 그 가문이 뭔가 새롭게 추스르기를 기원한다. 혹시나 지금 이 순간 삼성의 이름으로 억울하게 회사에서 팽개쳐진 사람은 없는지, 옥에 갇혀 있는 사람은 없는지, 상처받은 사람은 없는지… 그런 일부터 풀어주는 새로운 가문을 꿈꿔본다. 그게 아름답고 애처로운 고인의 바람과도 맞는 게 아닐까 싶어서….

일러스트레이션 김순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