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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검객의 고백, <십오야>

“나에겐 1960년대 당시 영화를 기억하지 않으려는 본능적 거부감이 있다. 당시 10여년간 나는 영화계에 기생해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건강하지 못한 영화작업이었던 거다.”(<한국의 영화감독 13인>에서 재인용)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논할 때, 1970년대 이후 작품들만 거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감독 자신이 영화적 출발점으로 삼는 것도 <잡초>(1973)다. 그런데 사실 이전 시기 임권택 감독의 작업이 주목받지 못한 것엔 다른 억울한 이유도 있다. 영화를 직접 본 사람도 적거니와 자료도 접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십오야>는 1960년대 임권택 감독이 만든 시대활극영화다. 언젠가 일본의 평론가 사토 다다오는 “한국의 시대극은 액션 중심보다는 주로 궁중 안의 정치적 논쟁이나 족벌끼리의 세력다툼에 치중했던 것 같다”고 논평을 한 바 있는데 그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할 만한 작품이다. 임권택 감독은 <십오야>에서 일본 시대극이나 중국 무협영화를 연상케 하는, 혹은 간접적으로 영향받은 것으로 보이는 호방한 액션을 펼쳐보인다. 물론 다른 임권택 감독의 시대극처럼, <십오야>에는 유교 관습이나 가부장적 권위에 목졸려 있는 여성 수난사가 극의 중심에 놓여 있기도 하다. 박노식, 남진, 남정임 등의 스타들이 출연하는 이색작이다.

<십오야>는 어느 가족을 둘러싼 운명적인 대립과 갈등을 담는다. 현감 박만도는 반정을 꾀하고자 김병사의 가족을 몰살시킨다. 아들이 없던 박만도의 처는 버려진 김병사의 아들을 데려다가 무사로 키운다. 한편, 박만도의 처가 버린 딸은 검객으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세월이 흐른 뒤 ‘매화’라고 불리는 이 검객은 신출귀몰하면서 박만도의 부하들을 쩔쩔매게 만든다. 박만도의 아들은 매화라는 검객과 맞서면서 차츰 그의 존재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며 혹시 여성이 아닐까 의문을 품는다.

매화가 박만도의 부하들에게 붙잡히자 이제까지 감춰져 있었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다. 영화에서 시대활극영화의 몇 가지 클리셰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은밀한 사연을 간직한 남장여인, 정치적 임무를 띤 암행어사의 등장, 그리고 피맺힌 복수의 드라마가 촘촘하게 꼬리를 문다. <십오야>는 액션장면이 볼 만하다. 매화라는 검객은 여성의 몸으로 담을 넘나들고, 몇십명의 남정네들을 혼자서 검으로 상대하곤 한다. 임권택 감독은 주로 원형구도를 응용하면서 검객의 대결장면을 수려한 미장센으로 담아낸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칼싸움인데 주로 세트에서 촬영한 이 장면들은 배우의 화려한 몸동작과 카메라의 움직임이 결합되어 그럴듯한 효과를 낳는다. 감독 스스로는 폄하하고 있지만 당시 임권택 감독이 장르영화를 만드는 데 일정 정도 경지에 올라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후 <장군의 아들>(1990) 같은 영화를 만드는 데에 당시 경험이 적지 않은 내공으로 작용했을 법하다.

<십오야>의 결말은 그리 행복하지 않다. 장르의 전형적인 규칙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매화는 자신이 박만도의 딸임을 알게 되었음에도 얼결에 친모를 살해한다. 박만도의 아들은 매화와 운명이 뒤바뀌었음을 알고 망연자실한다. 정체를 드러낸 검객 매화는 다른 남성의 뒤를 따르는 대신, 홀로 등을 돌려 카메라로부터 차츰 멀어져간다. “마음이 갈 곳을 아직 못 정했다”라면서. <십오야>는 온전한 감독의 영화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지만 임권택 감독의 ‘정서’의 미학이 나아갈 길을 앞서보여준 작품임엔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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